WCA: 2019 – 12 – 16
[글 = 토니 사가미: Weiss Ratings Editor]
나는 아주 어려운 시기에 주식 브로커가 됐다.
소매 주식 중개인들에게 1980년대는 힘든 시기였다. 나는 젊고 멍청했으며 야심으로 가득 찼었다. 인플레이션은 두 자릿수에 달했고 1980년 4월에는 최고 14.5%까지 치솟았다. 연방기금금리는 1981년 20%에 도달했다. 그리고 미국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수백만 미국인들이 실업자가 됐다. 소비자들은 주택과 자동차 구입을 중단했다. 성공한 주택 건설업자였던 나의 최대 고객은 비즈니스를 접고 파산을 신청했다. 백만달러 단위였던 그의 계좌 잔고는 1년만에 0으로 변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종합한 궁핍지수(Misery Index)는 1980년 19.7%까지 치솟았다 … 이는 대공황 이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어려운 시기였다. 나처럼 커미션을 기반으로 봉급을 받는 샐러리맨들에는 더더욱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인격자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 의장에 임명했다. 그는 미친개처럼 인플레이션과 싸웠다. 볼커는 최후의 공직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더라도 올바른 일을 한다는 이상을 몸소 구현했다.
볼커는 그가 추구한 통화긴축정책이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농부들은 트랙터를 몰고 와 연방준비제도 건물을 둘러싸고 항의했다. 자동차 딜러들은 팔리지 않는 자동차 열쇠를 우편으로 보냈다. 주택 건설업자들은 옹이 구멍이 난 목판 조각들을 연방준비제도에 보냈다.
이 같은 항의에 대한 답변으로 볼커는1979년 10월 6일 연방준비제도 사상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워싱턴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TV 방송국들이 볼커의 기자회견을 취재할 잉여 인력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볼커는 CBS에 교황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을 취재해달라고 요청했다. “취재 인력을 이곳으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교황이 떠나고 난 뒤 오래도록 당신들은 이 일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기자 회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의 파괴적인 영향, 그리고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위한, 인기는 없지만 올바른 방법에 대해서도 볼커의 말이 맞았다.
볼커가 지난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별세에 애도를 표했다. 물론 그는 젊고 멍청한 주식 중개인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준비제도를 이끌 폴커와 같은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볼커 이후 연방준비제도는 (만화 주인공) 미스터 마구(Mr.Magoo)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국이 제로 금리, 양적 완화, 그리고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인해 더 나아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준이 취한 통화 정책은 궁극적으로 미국 경제를 아주 장기간 침체에 빠뜨리고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궁핍지수를 다시 1980년대 수준으로 돌려놓을 만큼 완화적이었다.
언제 그렇게 될 것인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경제적 궁핍을 피할 수 있는 충분한 보험을 갖고 있다.
어떤 종류의 보험이 있을까? 현금, 금, 그리고 일명 암호화폐인 디지털 금이 있다.
사실 나는 와이스 얼티미트 포트폴리오에 방금 금 채굴업체 주식을 처음으로 추천했다. 지금은 독자들도 이 같은 보험 기회를 살펴보기 시작할 때가 됐다.
번역/정리 = 장도선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