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최창환 대표] “비트코인 다시 2000만원 넘었다. 지갑 한 번 확인해봐.”
30대 직장인 A씨는 친구 B씨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금융회사 과장인 A씨는 2017년 11월 친구 말만 듣고 암호화폐에 투자했었다.
3년 전 연말 모임. 이름있는 게임사에 다니는 B씨가 암호화폐가 어쩌구, 비트코인이 어쩌구 얘기 보따리를 풀자 A씨는 솔깃해졌다. 마침 A씨 사무실은 강남 테헤란로였고, 여기저기서 비트코인이라는 단어를 듣던 참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암호화폐를 개발하거나, 투자해서 대박을 냈다는 ‘카더라’ 통신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비트코인은 21세기 금이 될 거야.”
B씨의 이 한 마디에 마음을 굳힌 그는 보너스를 반으로 뚝 잘라 비트코인을 샀다.
#비트코인과 디지털 골드러시
“그해 11월 중순 비트코인 1개에 700만원할 때 첫 투자를 했죠. 두 주 만에 1천만원을 넘기더니 12월 들어 2000만원을 뚫더라구요. 주식 투자도 해봤는데, 암호화폐 시장은 정말 신세계였어요.”
당시 테헤란로에는 그야말로 암호화폐 광풍이 불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금방이라도 인터넷처럼 대중화될 것 같았고, ‘토큰’, ‘코인’이라는 이름만 달고 있으면 수 십 배, 수 백 배 가격이 뛰었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가 전 세계 거래량 1위를 차지하고, 해외에서는 ‘암호화폐공개(ICO : Initial Coin Offering)’로 몇 시간 만에 수 천 억원을 끌어 모은 블록체인 스타트업도 등장했다.
#2018년 1월 박상기의 난
A씨를 포함해 블록체인 업계, 암호화폐 시장의 관계자와 투자자들을 경악하게 한 사건이 터진다. ‘박상기의 난’이라고 부르는 정부의 강력한 경고가 나온 것은 2018년 1월 11일이었다. 당시 박상기 법무장관은 “암호화폐 거래금지, 거래소 폐쇄법을 준비 중”이라는 폭탄 발표를 했고, 국내 암호화폐 시장은 그야말로 초죽음이 됐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비트코인 매물이 쏟아졌다. 블록체인 기술 기업들이 발행한 코인 가격도 수직 하락을 거듭했다. 비트코인은 이듬해 2019년 3월까지 400만원대로 내려갔다.
“저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어요. 비트코인은 그래도 거래가 되잖아요. 광풍이 불 때 다른 친구들은 ‘잡코인’에 투자를 많이 했어요. 그런 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암호화폐에 쓴 맛을 본 A씨는 이후 비트코인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응답하라 2017…비트코인의 부활?
지난 3년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는 “역사상 최고의 버블”, “기술로 포장한 사기”, “컴퓨터 천재들의 장난감”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사망한 것처럼 보였다. A씨 같은 초기 투자자들이 암호화폐를 화제로 올리면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냐”는 핀잔이 날아왔다.
우리 정부가 기술로써의 블록체인과 투자 대상으로써의 암호화폐를 구분하고, “기술은 발전시키지만, 투기적 매매는 억제한다”는 정책도 바뀐 것이 없다.
그랬던 비트코인 가격이 다시 급등세다. 강력한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2만달러도 돌파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기대는 버블을 낳고…
3년전 비트코인 1차 랠리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봐야한다.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고, 상용화되기 이전이라도 블록체인 기술 그 자체에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도 똑같다. 지금은 누구도 자율주행전기차를 꿈이나 가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2018년 9월 월가는 머스크를 테슬라에서 쫗아내야 한다며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의 이상과 아이디어에 열광했던 투자자들이 “왜 대량 상용화가 늦어지냐”며 비난을 퍼부은 것.
암호화폐 1차 랠리 당시의 기대감은 상용화 실패, 잇따르는 코인 사기와 대형 해킹 사고, 규제 당국의 탄압(?) 등으로 일순간 꺼져버렸다.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가 꺼지고, 관객들도 다 떠난 빈 무대에서 누구도 새로운 쇼를 생각할 수 없었다.
#페이스북이 만든 반전 기회
블록체인 업계, 암호화폐 시장 분위기를 최악의 수렁에서 꺼낸 것은 페이스북이었다. 2019년 6월 페이스북은 초대형 IT 기업으로는 최초로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암호화폐, 리브라(Libra)를 만들겠다”고 선언헀다.
리브라 프로젝트는 블록체인 기술을 쓰지만 통상의 암호화폐와 다르게 각 국가의 법정 화폐를 기반으로 한다. 프로젝트의 명분도 좋았다. “은행 계좌가 없는 저개발 국가 소비자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
리브라 프로젝트는 그러나 블록체인 업계와 정책 당국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진정한 블록체인, 국가 화폐에서 독립한 암호화폐가 아니라는 것. 미국 등 전 세계 금융당국 입장에서도 리브라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였다.
이 같은 비난은 역설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정책 당국자들에게 디지털 화폐 도입을 앞당겨야 한다는 자극을 줬다.
#코로나 팬데믹…위험이 만든 기회
자칫 민간 기업에게 디지털 통화 주도권을 뺏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2019년을 보낸 후, 각국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중국, 유럽은 “일단 돈을 풀어 최악의 상황은 넘기자”는 정책을 편다.
코로나 상황이 악화될수록 기존 자산시장, 금융시장은 ‘돈의 힘’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일단 위기 상황에서 주목을 받는 금이 상승했다. 이어서 주식, 부동산, 원자재 가격도 올랐다.
비트코인이 탄생한 배경이 되는 ‘금융위기, 무제한 달러 살포’ 당시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비트코인이 디지털 골드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
비트코인 1차 랠리가 ‘기술적인 이상과 기대’를 주 동력으로 삼았다면 이번 상승은 “그래, 변한 것은 없어, 기존 금융시장과 경제 시스템은 확실히 위기에 취약해”라는 자각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특히 각국 정부, 기관투자자, 대형 금융기관(은행)이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 화폐에 대해 3년 전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첨단 기술에 익숙하고, 기존 금융 질서에 반기를 든 소수 개인이 주도하는 랠리와 성격이 다르다는 뜻이다.
#각성하는 정부, 디지털 화폐에 눈을 뜨다
단적으로 우리 정부의 긴급재난지원자금을 보자. 이제는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 지역상품권으로 집행하자는 주장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스마트 콘트렉트(Smart Contract) 기술을 이용하면 디지털 화폐에 프로그램을 해서 “마포구에 있는 연매출 3억원 미만 소형 식당에서만 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코로나 상황에 직격탄을 맞은 소상공인을 위한 맞춤형 지원이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CBDC 실험도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10월 선전시에서 5만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위안화 실전 테스트를 실시했다. 중국 주요 도시로 테스트를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은행도 CBDC 연구를 본격화했다.
글로벌 경제 패권을 놓고 중국과 대립 중인 미국도 CBDC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연방준비제도 레이럴 브레이너드 이사는 “기축통화로서 달러 역할을 고려할 때 연준은 디지털화폐 연구와 정책 개발에서 선두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큰 손이 움직인다
암호화폐 시장에 기관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커다란 변화다. 미국의 암호화폐 투자펀드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 기관 자금만 100억달러 이상을 받아 운영 중이다. 이 펀드에 돈을 넣는 대형 기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스닥 상장사 마이크로스트래티지는 평범한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다. 이 회사는 지난 8월 회사돈으로 비트코인에 직접 투자했다. 대표인 마이클 세일러는 “현금을 보유하는 것보다 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고 말했다.
8월 비트코인이 9000달러대였으니, 대략 2배 정도 가격이 오른 셈이다. 투자에 재미를 붙인 마이크로스트래티지는 이번에는 6500만달러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해서 그 돈으로 비트코인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누군가 큰 돈을 암호화폐 시장에 넣겠다고 하니 기존 대형 금융회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은행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투자한 글로벌 은행 DBS는 지난 10일 디지털 자산 거래소를 직접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DBS는 동남아 최대 은행 중 하나로 총 자산 5180억 싱가포르 달러, 약 423조원을 운용하는 초대형 은행이다.
암호화폐 투자를 원하는 기관 고객, 거액 개인 고객을 위해 비트코인을 보관해주는 업무를 하는 은행은 많이 있다. 그러나 대놓고 자기가 직접 암호화폐 거래소를 하겠다는 은행은 DBS가 최초다.
DBS는 비트코인 등 기존의 암호화폐 외에도 주식, 채권, 펀드를 ‘디지털 토큰’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초대형 빌딩이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모여서 펀드를 만들어 이 빌딩을 산 후, 시세가 오르면 되팔기로 했다. 중간에 기관 중 하나가 급하게 돈을 쓸 일이 생겼다. 자금을 내줘야 하는데 당장 빌딩을 팔 수는 없다. 이때 펀드 자체를 디지털 펀드로 바꿔서 부분 매각하면 빌딩 전체를 팔지 않고도 자금을 내 줄 수 있다.
DBS는 부동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투자 자산을 이런 식으로 디지털 토큰화해서 파는 새로운 디지털 금융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디지털 금융, 이제 시작이다
2008년 비트코인이 세상에 나온 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겨우 3년 전이다. 최악의 버블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던 비트코인은 암호화폐 시장의 대장주가 됐다.
암호화폐 낙관론자들은 비트코인 가격이 10만달러, 100만달러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금처럼 채굴량이 정해져 있고, 갈수록 희소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다. 투자 대상으로서 비트코인을 “지금이라도 사야하나”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암호화폐가 진짜 돈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시작해 글로벌 전자 결제 서비스를 하고 있는 페이팔은 지난 10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매매하고, 결제에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페이팔 가맹점은 전 세계적으로 2600만개에 달한다.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앞장서 떠들던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도 최근 인터뷰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가치저장 수단이 될 수 이다”고 말을 바꿨다.
비트코인이 뿌린 디지털 금융은 드디어 출발선에 섰다. 각국 정부, 기업, 기관투자자, 은행 등은 기술적인 방법론으로써의 ‘디지털화’가 아닌 금융이라는 개념 자체가 디지털 전환하는 것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스마트 콘트렉트를 이용하면 돈을 예금하고, 빌리는 전형적인 금융에 은행이라는 중간자가 필요치 않다. 정책 당국과 기존 금융기관들은 디파이(DeFi : Decentralized Finance)라고 하는 탈중앙금융 서비스 프로그램(프로토콜)이 급성장한 것을 주시하고 있다.
누구한테 돈을 맡기고, 누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하는 판단을 사전에 짠 프로그램 안에 넣어두고, 그 규약(프로토콜)대로 암호화폐를 예치하고, 대출한다. 아직은 실험적인 수준이지만 디파이는 기존의 금융 판도를 완전히 바꿀 핵폭탄이다.
이런 모든 기대와 가능성, 그리고 부분적인 서비스의 실현이 비트코인 가격을 2만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본 기사는 17일 한국일보에 기고한 <부활한 비트코인…”3년 전 롤러코스터와는 다르다”>에 일부 내용을 보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