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최창환 대표] 비트코인은 돈인가? 이 얘기를 하려면 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은행에서 취급하는 여러 돈 가운데 가장 힘있는 돈은 뭘까? 어디서나 통용되고, 그 가치를 의심받지 않는 돈.
중미 카리브해에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가 있다. 이 나라 돈은 바베이도스 달러(BBD)다. 누가 물건을 사면서 BBD를 내면 받아야 할까. BBD대신 미국 달러를 낸다면. 당연히 받는다. BBD도 돈이지만, 미국 달러만큼 대우를 받지 못한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달러와 비트코인
달러는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돈이다. 달러를 받지 않는 상인은 없다. 달러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힘 있는 돈’이다. 그 힘은 곧 미국의 힘이다.
달러로 표시되는 미국 국채는 누구나 산다. 미국 경제가 나빠져도 이 채권은 산다. 앙숙인 중국도 미국 국채는 산다. 미국이니까, 달러니까. 하지만 철옹성 달러의 마법이 약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 국채 대신 다른 것을 살 수 있다면? 더 안전한 자산, 더 믿음이 가는 자산을 살 수 있다면? 지금까지는 금(gold)이 이런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달러 가치를 표시하는 인덱스가 있다. 달러 인덱스가 떨어지면 금 가격이 올랐다. 금 말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암호화폐 비트코인이다.
올 들어 달러는 등락을 거듭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경기 부양책이 예고된 만큼 처음에는 달러 인덱스가 떨어졌다. 막상 부양책이 나오고, 대통령 취임식이 무사히(?) 끝나자 달러는 반등했다.
시장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됐다. 달러가 약해지면 비트코인이 오르고, 달러가 강해지면 비트코인이 내리는 것이다. 마치 금처럼. 월가의 기관투자자들은 금 외에 다른 투자 수단을 열심히 찾았고, 일부는 비트코인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그 영향으로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해 10월부터 가파르게 올랐다. 비트코인이 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어떤 면이 금만큼 매력적이었을까.
#디지털 골드
전 세계 채굴된 금은 19만 톤 정도다. 시가총액은 10조~12조 달러. 금속인 금 자체를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금융상품으로 만들어진 금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 ETF(상장지수펀드)다. 금 시세에 따라 가격이 움직이지만 금은 아니다. 이런 투자 상품을 ‘페이퍼 골드’라고 한다. 금 ETF 중 가장 큰 10개의 시가총액만 1,102억달러에 달한다. 페이퍼 골드는 숫자다. 실물 가격을 복사한 것이다. 거래시 주고 받는 것은 전자적인 신호, 즉 디지털화한 숫자다.
실물 금 가격이 온스당 1,800달러다. 금 값이 오를 것 같다. 종로4가 귀금속상가에 간다. 황금 송아지를 한 마리 산다. 대형 금융기관이나 투자회사가 이런 식으로 금에 투자할 수 없으니까 페이퍼 골드, 금 선물을 만들어냈다. 진짜 금은 금고에 잘 넣어두고, ‘그 금이 거래된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숫자만 주고 받는다.
여기서 질문. 금고에 금이 있다는데, 그걸 진짜 본 사람이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 속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힘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금을 만지거나 보지 않아도 매매한다. 디지털화한 금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금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중요한가?
이 지점에서 금이라는 실물과 금값은 분리된다. 같은 원리로 전자 네트워크에 ‘어떤 정보’를 담아 교환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사람들이 ‘디지털 골드’를 생각해냈다. 금과 금의 값이 떨어졌듯이, 돈이라는 관념을 따로 떼어내보자. 그 안에 정보를 담고, 사람들이 그 정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곧 돈 아닌가. 비트코인은 이런 아이디어를 블록체인 기술을 써서 최초로 구현했다. 그런 뜻에서 디지털 골드라고 부를 수 있다.
시작부터 디지털인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나 금보다 훨씬 쉽게 디지털 금융상품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초대형 금고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원하는 단위로 얼마든지 잘게 쪼갤 수 있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해 클릭 몇 번으로 거래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다. 네크워크에서 상상이나 이미지는 ‘1+1=2’처럼 산술적으로 퍼지지 않는다. 제곱의 속도로 확산한다.
A는 손님, B는 피자 가게 사장, C는 운동화 가게 사장이다. A는 비트코인을 주고 B에게는 피자를, C에게는 나이키 운동화를 샀다. 비트코인은 적어도 B와 C 2명에게는 돈의 기능을 했다. 2명으로 시작한 비트코인이 각각 2명씩 새로운 사용자를 찾아나섰다. 제곱으로 늘어나는 확산의 법칙에 따라 25단계가 되면 총 사용자는 6,710만8,862명이 된다. 우리나라 인구 수보다 많다.
‘거래 정보를 담는 디지털 화폐’라는 개념이 서고, 그 동조자를 2명씩만 모아도, 그 쓰임을 인정받는 순간,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있다. 새로운 돈의 힘은 특정 국가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네트워크 전체가 힘이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비트코인을 채택한 미국의 페이팔은 빠른 속도로 충성도 높은 사용자들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다.
#새로운 돈
뉴욕타임즈는 지난 12일 비트코인 800개를 분실한 사람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 현시세로 2,500만 달러 어치다. 가브리엘 아비드. 34세 사업가로 바베이도스 출신이다. 바베이도스에서는 은행계좌, 신용카드를 만들기 어려웠다. 전자결제 서비스 페이팔 계정도 열 수 없었다. 그는 비트코인을 접하면서 디지털 금융의 세계로 단숨에 진입할 수 있었다. 비록 800개를 잃어버렸지만, 아비드는 2011년 이후 비트코인 거래를 통해 상당한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바베이도스 해안 근처에 100에이커(12만평) 땅을 샀다. 아비드에게 바베이도스 달러는 돈이다. 미국 달러도 돈이다. 그리고 비트코인도 돈이다. 비트코인은 그에게 금융의 문을 열어줬고 막대한 부도 쌓을 수 있게 도와줬다.
“비트코인으로 받을래?” 베트남 사업가들이 서비스나 용역을 제공하고 자주 듣는 얘기다. 아랍의 여성들은 아버지, 남편이나 남자형제 모르게 경제활동을 할 때 비트코인을 사용한다. 필리핀 가정부들은 계좌가 없는 가족들에게 비트코인을 송금한다. 촘촘한 달러지배망에 구멍이 생기고 비트코인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월가 금융회사들이 ‘돈의 냄새’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디지털 자산 맡아 드려요”
JP모건, 시티그룹, 골드만삭스는 디지털 자산을 보관하는 수탁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비트코인 같은 디지털 자산을 맡아주면서 부수 업무를 통해 돈을 번다는 복안이다. 미국 금융당국은 은행들의 이같은 행보를 적극 지지한다. 재무부 산하 통화감독국(OCC)은 은행이 디지털 자산을 맡아 보관할 수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OCC는 결제 시 암호화폐를 이용해도 된다고도 했다. 나아가 은행이 직접 암호화폐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비트코인은 OCC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은행이 취급하는 돈이다.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라
바베이도스에서 아비드가 그렇게 가입하고 싶어하던 페이팔은 미국의 카카오페이다. 페이팔은 지난해 10월 비트코인을 받아들였다. 이 뉴스를 신호로 비트코인은 랠리를 시작했다. 페이팔 가입자는 3억5,000만명에 달한다. 페이팔 앱에서 암호화폐는 돈이다.
월가 투자은행은 이런 페이팔을 어떻게 평가할까? 미즈호증권의 댄 돌래브는 지난 15일 페이팔 목표 주가를 290달러에서 35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돌래브는 페이팔 앱 사용자를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는 “페이팔 암호화폐 사용자의 절반이 이 앱을 매일 열어본다”며 “2023년까지 비트코인 관련 매출이 20억 달러 가까이 창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돌래브에 따르면 비트코인 사용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용자 대비 3배나 더 많이 페이팔을 이용했다. 매출 증가 기여도가 10%에 달했고, 현금 비중도 높았다.
암호화폐 사용자는 고급 손님이다. 미래세대가 선호한다. 누가 이들을 먼저 잡느냐, 새로운 돈의 네트워크를 지배하느냐. 싸움이 시작됐다.
*[기승전 비트코인]은 한국일보에 매월 게재되는 칼럼입니다. 본 기사는 23일 한국일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