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회사원 A씨는 새벽 잠을 설쳤다. 미국의 유명한 NBA 농구 스타 사진이 들어 있는 카드를 구매하기 위해 NBA톱샷(Top Shot)이라는 사이트를 밤새 지켜봤기 때문이다. A씨가 농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10대 소녀도 아니고, 사진 카드 하나 사자고 이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 세상 하나 뿐인 디지털 컬렉션, NTF
NBA톱샷에서 거래되는 스타 사진은 블록체인 기술로 만든다. 플로(FLOW)라는 이름의 블록체인 위에 한정 수량만 등재된다. 이른바 대체불가능토큰(Non Fungible Token, NFT)이다. 초창기에 발매된 NBA톱샷 카드는 한 꾸러미에 10~20달러에 불과했다. 이게 어느 순간 수천 달러를 호가하게 됐다.
친구가 이 사이트에서 10만 원 주고 산 NFT 카드를 200만 원에 되팔았다는 얘기를 듣고 A씨도 NBA톱샷에 빠져들었다. NFT가 뭐고, 이걸 어디에 쓰려고 이 난리일까?
# 무한 카피의 역설… 디지털에 희소성을 담다
디지털 기술은 ‘카피 앤드 페이스트(Copy and Paste)’를 쉽게 하는 것이 매력이다. 손으로 쓰거나, 활자로 인쇄해 보관하던 문서를 디지털화하면 수백만, 수천만 개의 복사본을 인터넷 공간에 뿌릴 수 있다.
NFT는 정반대다. 블록체인 위에 단 한 개만 존재하도록 만든 디지털 토큰이다. 동일한 사진이라도 판화처럼 번호가 부여돼 ‘단 하나’라는 독자성이 유지된다. 이러한 희소성이 토큰의 상품 가치를 끌어올리는 요소다. NFT가 NBA톱샷 같은 스포츠 마케팅과 결합하면서 단기간에 성공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NBA톱샷은 유명 농구스타 카드를 주기적으로 내놓는데, 그 카드에 어떤 스타가 들어 있는지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다. 운 좋게 스타 중의 스타 사진이 들어 있으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희소성을 갖춘 데다 수집가들의 수요가 많은 스타이다보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10달러에 산 카드가 1,000달러 2,000달러에 재판매된다.
블록체인 기술을 쓰기 때문에 위·변조 위험도 없다. 정해진 수량 외에 추가 발행도 안 된다. 수집가들과 투자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NFT 시장은 얼마나 클까.
# NBA톱샷, 5개월 매출 3억 달러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조사한 확인 가능한 NFT 시장 규모는 5억~6억 달러다. NFT 시장 조사 업체마다 통계가 들쭉날쭉인데, FT 통계를 일단 기준으로 해보자. NBA톱샷은 지난해 10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약 5개월간 매출이 3억 달러다.
가장 큰 규모다. 두 번째로 큰 상품은 크립토펑크다. 1억100만 달러. 이어서 해시마스크가 3,750만 달러, 크립토키티즈가 3,210만 달러 등이다. 전체 NFT 상품 매출 중 절반 이상이 NBA톱샷이다.
NBA톱샷을 운영하는 업체는 대퍼 랩스(Dapper Labs)라는 캐나다 기업이다. 2017년 이더리움이라는 블록체인 위에서 돌아가는 게임, 크립토키티즈를 만들어 유명세를 탔다. 가상의 고양이(Kitty)를 키우는 캐릭터 게임인데, 각각의 고양이를 NFT로 만들어 팔 수 있다. 이 기술을 NBA톱샷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대퍼 랩스는 NFT 사업이 주목받으면서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기업 가치는 20억 달러로 평가받았다.
NFT의 희소성이 스포츠 카드나 게임 캐릭터에만 적용될까. 수집가들의 지갑을 열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은 예술품이다. NFT가 예술품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고 있다.
# 부창부수… 일론 머스크와 그라임스
캐나다 가수인 그라임스가 그린 디지털 그림이 있다. 그라임스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의 여자 친구로, 두 사람 모두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 자산시장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라임스의 이 그림은 디지털 세계에 NFT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라임스의 노래도 배경 음악으로 들어 있다. 그라임스는 ‘디지털 퓨전 그림’ 10점을 온라인 경매를 통해 팔아 20분 만에 580만달러(약 65억원)를 벌었다.
그림, 음악, 그리고 그라임스라는 셀럽의 이름 값까지 NFT 안에 담겨 있는 셈이다. 리얼월드가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복제와 위조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 위에 디지털 지문을 묻혔더니 디지털세상의 예술품가치가 수십억 원이 된 것이다.
그라임스의 그림과 음악이 얼마나 예술적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일단 답하지 말자. 희소성과 유일성이 NFT의 소장 가치를 극대화하는 현상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예술성과 스토리가 담긴 디지털 작품도 많다. 디지털 아티스트로 오랜 기간 활동해온 마이크 윈켈만. 디지털 공간에서는 비플(Beepl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가는 무려 5,000일 동안 매일 디지털 작품을 제작했다. 그 모든 작품을 하나로 모아 ‘에브리데이스(Every Days)’라는 디지털 대작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NFT 사상 최고인 6,934만 달러(약 786억 원)에 팔렸다.
비플의 대작은 5,000일이라는 숫자가 주는 웅장함만으로도 다른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경이감을 준다. 이 작품이 디지털 아트이고, NFT라는 것은 어쩌면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과 기술이 절묘하게 결합해 새로운 경지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가 우선이다.
# NFT와 미래의 예술품 시장
예술품 수집 시장은 NFT를 혁명으로 여길 만하다.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위작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령의 다작 화가는 본인도 “이것이 내 작품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NFT화한 작품은 이런 의문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다. 전통적인 예술품 제작 방식에서는 작가의 친필 사인이 거의 유일한 ‘인증’이다. 블록체인 기술과 NFT는 디지털 공간 내에서 인증을 보증한다.
NFT 기술은 예술품의 분할 소유권도 인증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을 NFT로 만든 후, 제한된 개수의 소유권을 별도로 NFT화할 수 있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예술 작품을 몇만 원 수준으로 낮춰 소장(투자)할 수 있게 한다.
서울옥션은 관계사 서울옥션블루, 신한은행 등과 손잡고 미술품 디지털 자산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서울옥션이 유망 작가를 발굴하면, 이 작가의 작품을 서울옥션블루가 디지털화해 미술품 공동구매서비스인 소투(SOTWO)를 통해 판매하는 것이다.
기존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디지털화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신진 화가들은 다르다.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으로써 디지털 월드가 이들에게는 기회다.
# NFT 시장, 벌써 버블?
회사원 A씨는 결국 원하는 농구 스타 카드를 손에 넣지 못했다. 여러 번 카드 판매에 참여하지 않으면 대박 상품을 건지기 쉽지 않다. NBA톱샷에 적용된 기술이 플로라는 블록체인이기는 하지만, 이 사이트 운영은 전혀 ‘블록체인’스럽지 않다.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데 디지털 자산이 없어도 된다. 신용카드만 있으면 된다.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로도 이용이 가능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어떤 카드에 어떤 농구 스타가 들어갈지도 운영사인 대퍼랩스가 독단적으로 결정한다. 중앙집중적인 비즈니스다.
게임사에서 확률형 아이템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것이 문제가 되듯이, NBA톱샷은 철저하게 수집가들의 사행심을 자극한다. 출금이 불편한 것도 이용자들의 불만이다. 과거 일부 암호화폐 거래소가 출금을 제한한 것과 유사한 행태를 보인다. 가두리 양식장처럼 고객 돈을 묶어 놓고 재투자를 유도하는 것이다.
예술품 NFT도 일견 터무니없는 가격이 형성된다는 문제가 있다. 작품성이나 소장 가치를 떠나 희소성과 이름값에 기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앞서 소개한 그라임스의 작품도 “만약 일론 머스크의 애인 그라임스가 제작한 것이 아니라면…”이라는 의문이 달린다.
# 메타버스 시대… 디지털 월드가 눈앞에 있다
이 모든 논란과 버블 우려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월드는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메타버스(Metaverse)의 아성인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의 미국 주식시장 직상장이다.
로블록스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다. 이 안에는 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콘서트도 열리고 친구도 사귄다. 로블록스에서 통용되는 로벅스(Robux)라는 화폐도 있다. 로블록스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로벅스로 1만 달러 이상 수익을 기록한 개발자, 게임 크리에이터는 1,050명에 달한다. 10만 달러 이상 고수익 개발자도 250명이나 된다. 웬만한 월급쟁이 이상의 수익을 가상공간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로벅스로 지급된 총 금액은 2억902만 달러에 달한다.
로벅스는 일종의 게임 머니지만 로블록스 세계관 안에서 각종 캐릭터를 NFT화하는 새로운 사업을 생각해볼 수 있다. 리얼월드를 디지털화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월드 안에서 자체적인 NFT 비즈니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로블록스 게임에서 내가 획득한 희귀 아이템을 NFT로 만들어 다른 로블록스 이용자에게 판다. 그 이용자는 해당 게임 아이템으로 로블록스 안의 다른 게임을 한다. 리월월드와 관계없이 가상 공간에서 가상의 자산을 사고파는 셈이다.
장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인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이 칼럼은 3월20일 한국일보에 게재된 ‘기승전 비트코인’ 연재 칼럼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