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중국 부동산 재벌 헝다그룹의 채무불이행 우려가 글로벌 경제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블록미디어는 지난 2019년 [실록! 한국경제] 시리즈를 통해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 상황을 자세히 정리한 바 있습니다. 해당 시리즈 중 헝다 사태 대응에 참고가 될 기사를 다시 게재합니다.
[실록! 한국경제]⑬ 위기의 전조…한보 부도
[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97년 1월23일 오후 5시35분. 한보철강 채권금융기관회의가 소집된 제일은행 본점 회의실.
“정태수 총회장이 경영권 포기를 거부함에 따라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키로 결정했습니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보철강의 ‘부도’를 선언했다. 투자규모만 5조원대를 넘어서는 거함 한보철강이 침몰하는 순간이었다.
한보철강 부도는 한 재벌기업의 몰락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 질서와 정치구도를 뒤흔드는 초대형 핵폭풍으로 비화하며, 10개월 후 IMF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전초로 작용한다.
◆ 비운의 시작
“쇳가루를 만지면 흥합니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고로 불리는 한보 부도 사건의 서막은 어이없게도 한 역술가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한다.
85년 가을. 종로5가 보령약국 뒷편에 위치한 B철학원에 중절모를 눌러쓴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가 찾아들었다.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가능성이 있습니까?”
사나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역술가는 이에 “흥한다”는 말로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간단히 종료됐고 중절모의 사나이는 타고 온 검은색 벤츠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중절모의 사나이는 다름아닌 정태수 한보철강 회장이었다. 숱한 곡절을 겪으며 `자물쇠“오뚝이“불사신`으로 불렸던 정 회장이 과연 무슨 이유로 역술원을 찾은 것일까.
비운의 기업 한보철강의 탄생 비화는 여기서 부터 출발한다.
신규사업으로 철강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던 정 회장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점술가에게 진단을 부탁했고, 긍정적인 답변에 만족했다. 운명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확신했던 정 회장에게 “흥한다”는 역술가의 점괘는 사업성공을 알리는 청신호나 다름없었다.
정 회장이 서울 북부세무서 주사를 끝으로 23년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게 된 계기도 역술가의 조언 때문이었다. “사업으로 대성할 운이니 당장 공무원 그만두고 흙(土)과 관련된 일을 하라”는 역술가의 조언에 힘입어 기업가로 변신한 정 회장은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가도를 달린다.
정 회장은 첫 사업으로 몰리브덴 광산을 개발해 사업기반을 다진데 이어 78년에는 당시 최대 규모인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4424세대를 분양,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흙과의 인연을 재확인했다.
◆ 아파트건설 부지로 인수한 철강공장이 모태
한보그룹이 철강사업에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이처럼 일반적인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예측불허의 요인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단 시작부터가 무계획했다.
한보가 철강업계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84년 부산 사상구 구평동 해안가에 위치한 10만평 규모의 금호산업(철강업체)을 인수하면서 부터다.
당시 한보는 금호그룹으로부터 섬유 철강 등 2개 업종 중 하나를 골라서 인수할 수 있었으나 경기가 별로 좋지 않았던 철강 쪽을 선택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남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선택이었다.
당시 한보가 금호산업을 인수한 이유는 단지 구평동 공장 땅이 아파트 건설부지로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철강사업 보다는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 매각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보가 금호산업을 인수하면서 부터 바닥세를 면치 못하던 철강경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건설경기 회복과 중국특수 등에 힘입어 국내외 수요가 살아나면서 철강업은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알짜배기 사업으로 급부상했다.
아파트 건설 부지로 인수한 이 회사는 이후 한보철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면서 한보그룹의 주력기업으로 떠올랐고, 2년 후인 86년에는 정 회장에게 5000만달러 수출탑을 안겨준다 .
정 회장은 이때부터 “철강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제2차 철강사업 확장계획에 나선다. “쇳가루를 만지면 흥한다”는 역술가의 조언이 한 몫을 거든 것도 바로 이 때다.
철강사업 확장계획은 곧바로 구체화 됐다. 아산만 76만평을 매립해 세계 5위 규모의 초대형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사업이 시작됐다. 비운의 프로젝트 “당진제철소”의 탄생이다.
◆ 불안한 출발…부지매립 과정의 문제점
그러나 당진제철소는 출발과정에서 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됐다. 기초적인 자금조달 계획은 물론 부지매립 과정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8년 후 닥쳐올 한보철강의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보가 매립면허를 받은 충남 당진군 송산면 고대리 앞바다는 당초 공유수면 매립 기본계획에 지정돼 있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보측의 매립요청이 있은 직후인 89년 6월 경제장관회의를 거치면서 공유수면매립지로 전격 고시된다.
정부는 이미 80년대초 전 국토에 대한 매립기본계획을 세우면서 당진제철소가 들어선 아산만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대형선박이 드나들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매립지로 부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이 한보의 매립요청 이후 느닷없이 변경된 것이다.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도 제기됐다. 매립허가 과정에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아산만에는 삼성종합건설이 전기 전자 제지공장 부지로 매립요청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같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보의 매립요청은 허가된 반면 삼성측 요청은 기각됐다. 당연히 특혜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실제로 당시 동력자원부는 한보의 매립요청 지역이 한전의 가곡리 화력발전소 炭처리장과 중복된다는 점을 들어 당연히 반대의견을 개진해야 했음에도 “의견없음”이라는 이유로 공유수면 매립지 추가지정을 가능케 했다. 한전은 이 과정에서 한보측이 요청한 91만평 중 발전소 건립부지로 14만9천평을 양보받는데 만족했으며, 그나마 이 땅도 95년들어 한보측에 고스란히 넘겨줌으로써 두고두고 외압설에 시달리는 빌미를 제공한다.
또 해운항만청은 89년 2월 발표한 의견서에서 “평택항으로 편입 운용될 지역”이라며 반대의사를 밝혔다가 3월 21일 이를 특별한 이유없이 취하했고, 충청남도 역시 삼성종합건설이 신청한 B지구에 대해서만 정당한 사유없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거의 같은 여건의 인접해역에 삼성과 한보가 부지매립을 신청했으나 삼성측 요청은 불허되고 한보의 요청에 대해서만 허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매립허가를 둘러싼 특혜시비는 일과성 논란으로 끝나 버리고, 한보는 그해 12월 정부로부터 아산만 76만8천평에 대한 정식 매립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한보철강은 이처럼 출발단계에서 부터 의혹과 베일에 가려진 의문의 기업이었다.
◆ 예고된 부도…자금조달의 허구성
매립 초기단계에 한보측이 제시한 자금조달 계획도 원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 회장은 91년 1월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진제철소에 소요되는 총 사업비 1조1786억원 가운데 4590억원을 주택사업, 유상증자, 사채발행 등을 통해 자체조달할 계획”이라며 “주택사업으로 개포, 수서지구 3천세대, 가양 등촌지구 4천세대 건립을 올해 시작하고 93년부터는 부산공장 이전에 따른 아파트 1만세대 건립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 회장이 주자금원으로 밝힌 수서지구 3천여 세대 아파트 건립계획은 주택조합에 대한 서울시의 택지 불법공급을 전제로 한 것으로, 후일 “수서사건”이라는 대형 부조리로 터져 나오면서 전면 백지화된다. 정 회장은 이 사건으로 일생 세 번의 구속 중 첫 번째 구속 테이프를 끊는다.
또 가양 등촌지구 역시 한보가 임직원 명의로 자연녹지 4만6천여평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률상 한보에 대한 택지공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판명된다. 높은 곳(?)으로 부터의 불법이 전제되지 않는 한 택지공급이 이루어질 수 없는 땅이었다.
결국 정 회장이 밝힌 4590억원의 자체 자금조달 계획은 애초부터 부정과 불법을 염두에 둔 무리한 발상이었으며 현실화되기 어려운 계획이었다.
이에 대해 한보여신을 담당했던 당시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한보그룹이 당진제철소 총사업비 1조1700억원 가운데 7130억원을 금융기관에서 차입하고 나머지 4600억원을 자체조달하겠다는 내용의 1차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었다”며 “자료분석 결과 소요자금중 90% 가량을 은행빚으로 조달할 속셈인 것으로 판명돼 자금지원을 거절한 바 있다”고 밝혔다.
“사업은 99%가 운”이라는 정 회장의 평소 지론처럼 투자규모 5조원대에 달하는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신기루는 이렇게 무계획과 불법의 소지를 안고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보철강 부도는 이미 시작단계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은행대출 4년만에 8배 급증
97년 4월 17일 국회 한보조사특위 청문회장.
증인으로 나온 이형구 전 산업은행 총재에게 특위의원들의 서릿발 같은 추궁이 쏟아졌다.
“92년 12월 31일 이루어진 한보에 대한 외화대출은 사업성 검토와 기술검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차입신청 후 불과 4일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타당성 조사도 하기 전에 먼저 대출해준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정 회장이 한보의 자금실무자에게 “산업은행에 대출신청한 것이 잘 될테니 염려말고 돈받을 준비나 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증인과 정 회장간에 사전약속이 있었던 게 아니냐.”
“…” 이 전 총재는 곤란한 듯 답변을 거부했다.
91년 2월 수서사건 파문으로 구속됐던 정 회장은 그 해 7월 집행유예로 풀려 나오면서 내밀하게 그룹 재기에 나섰다. 표면상 경영 전면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당진제철소 완공을 그룹 재도약의 계기로 설정하고 제철소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동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정 회장의 자금동원 타깃은 은행이었다.
수서사건 이후 한보그룹에 대한 금융권 대출이 재개되기 시작한 것은 92년말 산업은행의 외화대출이 그 시발점이 된다.
외화대출이란 은행들이 해외에서 직접 조달하거나 한국은행에서 빌린 외화를 시설재 수입결제용으로 빌려주는 제도로, 장기저리(당시 대출금리 7%)라는 잇점 때문에 특혜성 자금으로도 불렸다.
외화대출은 특히 주무부처인 상공부의 추천을 받아야만 하는데 당시 상공부는 34개 업체에 4억200만달러를 배정하면서 유독 한보철강에만 3600만달러라는 거금을 추천해 물의를 빚는다. 3600만달러는 당시 1개사당 평균 배정액 1100만달러의 세 배가 넘는 금액으로, 상공부 추천 여부가 외화대출에 그대로 반영돼던 당시 정황에 비추어 두고두고 특혜시비의 고리로 남는다.
상공부의 외화대출 추천을 근거로 산업은행은 차입신청 접수 후 불과 4일만인 92년 12월 31일 한보철강에 1984만달러를 대출해준다. 자금지원은 말그대로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신속하게 집행됐고, 대출이 이루어지기 전에 검토했어야 할 ‘타당성평가 보고서’는 수십일이 지난 다음해 1월에야 제출됐다.
산업은행이 이처럼 ‘한보 금융여신 재개’의 총대를 짊어지고 나섰고 이후 제일 조흥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이 합세하면서 한보그룹의 여신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93년 3889억원에 불과했던 한보철강의 은행권 여신은 94년들어 1조4924억원, 96년 3조208억원, 부도나던 97년 1월말에는 3조2648억원으로 늘어났다. 불과 4년 사이 은행차입 규모가 8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산업은행은 이 같은 한보그룹 여신 주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후일 은행감독원으로부터 문책을 받게 된다. 은감원은 한보부도로 인한 파장이 확산되던 97년 2월 20일 채권은행들에 대한 특검결과를 발표하면서 산업은행을 ‘여신취급 불철저기관’으로 문책했다. 은감원은 “당시 한보철강이 제시한 1,2단계 사업에 대한 사업성 검토에서 한국기업평가로부터 ‘실현가능성에 대한 현실성과 구체성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받았음에도 산업은행이 이를 무시하고 대출을 강행했다”고 문책사유를 밝혔다.
한보그룹에 대한 금융권 대출은 이렇게 의혹과 특혜시비 속에서 그 막을 올린다. 수서사건 이후 은퇴했던 정태수 회장이 문민정부 출범 후인 93년 경영일선에 복귀한 것과 때맞춰 산업은행을 필두로 일반 시중은행들이 합세해 일제히 한보 지원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것이다.
◆ 배포 큰 ‘떡값’과 금융권 대출
93년을 넘기면서 한보그룹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한한 자금동원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무려 5조원대의 자금이 투입되는 아산만 철강단지 사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다른 신규사업에 잇따라 진출하는 등 근거를 알 수 없는 거액 자금이 한보의 주머니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한보그룹은 93년 7월 연매출 400억원대의 상아제약을 인수한데 이어 94년 7월 삼화상호신용금고, 96년 2월 유원건설, 96년 11월 대동조선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그룹 외형을 확장해 나갔다.
문제는 그 막대한 자금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점이다. 대답은 간단했다. 은행을 비롯한 각 금융기관들이 적기마다 정 회장의 자금줄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부도가 나던 97년 1월말 현재 한보철강의 은행권 대출금은 3조2648억원. 여기에 제2금융권 대출과 회사채 등 사채발행분까지 포함할 경우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자금은 총 5조559억원에 달했다.
검찰은 이 가운데 3조5912억원은 시설자금으로, 1조2511억원은 운영자금으로 활용됐고, 나머지 2136억원은 유용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5조원에 달하는 투자금액중 90% 이상을 금융기관 돈으로 메꾼 데 이어 그나마 일부는 다른 용도로 유용했다는 얘기다.
한보그룹이 이처럼 금융기관 자금을 마치 제 돈처럼 갖다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 회장 특유의 로비력이 큰 몫을 담당했다. 남들보다 ‘0’자 하나가 더 붙은 자금을 살포한다는 정 회장의 배포 큰 떡값이 정계와 관계를 무시로 넘나들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이 95년 1월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10억원의 자금을 수수했으며,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이철수 신광식 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황병태 정재철 신한국당 의원, 권노갑 국민회의 의원 등이 정 회장으로부터 각각 수억원의 로비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철창신세를 졌다.
홍 전 수석은 93년 8월 사정당국이 한보그룹에 대한 내사에 착수하자 이를 무마해준 혐의가 적용됐다. 홍 전수석은 특히 한보부도 파문이 확산되던 97년 2월 5일 “나는 실세가 아니라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깃털론을 제기해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 회장이 자칭 ‘한국의 보물(韓寶)’를 ‘크게 지킬(泰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무차별적인 자금살포가 주요 무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사과상자에 차곡차곡 쌓여 뭉텅이로 전달된 수십억원대 로비자금은 불과 수년 후 ‘한국의 보물’뿐만 아니라 정관계는 물론 ‘대한민국 경제’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독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파국의 시작…”어음과의 전쟁”
온갖 의혹과 질시 속에서도 늠름하게 버티던 한보철강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96년 6월부터다.
당진제철소 건설에 당초 예상보다 2조원 가까이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된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철강경기마저 고꾸라지면서 그룹 주력인 한보철강은 `자금난`과 `재고누적`이라는 이중고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워낙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데다 연이은 신규기업 인수로 그룹 자금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이 때 부터 한보철강은 매일 매일 피를 말리는 어음과의 전쟁에 나서야 했고, 그룹은 그룹대로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당장 화급한 문제는 하루하루 교환에 돌아오는 어음을 막는 일이었다. 수십~수백억원대의 어음은 연일 저승사자처럼 제 집을 찾아 돌아왔고, 한보그룹 자금부 직원들은 이를 막느라 자정까지 퇴근을 하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어 갔다.
파국의 전조는 증권시장에서 부터 불거져 나왔다. 소리없이 한보 부도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증권가 정보지에는 한보 부도가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급기야 검찰이 나섰다. 검찰은 한보 부도설을 유포한 혐의로 바클레이즈증권 서울지점장이었던 주모씨를 소환했고,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한보 부도설이 공론화되는 사건이었다.
금융기관들도 난리였다. 각 은행 융자부는 매일 밤 한보철강에 자금결제를 독촉하는 전화를 걸어야 했고, 종금사 일선 부서에는 한보어음은 무조건 교환에 부치라는 밀명이 떨어졌다.
사채시장 역시 한보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출처불명의 인물들이 수백억원 규모의 한보철강 어음 뭉치를 들고와 파격적인 할인율을 제시하며 와리깡(어음할인)을 요구했다. “30%이상 할인해도 좋다. 필요하다면 세금계산서를 붙여 진성어음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며 할인을 닥달했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자금순환의 안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채꾼들이 쉽사리 받아줄리 만무했다.
한보는 그러나 저력있는 기업이었다. 어디서 구해오는 지 몰라도 회사 중역들은 쉼없이 금융권 대출을 뽑아냈고, 이는 연일 치러지는 어음과의 전쟁을 막는 일회용 총알로 소진됐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자금은 정 회장이 청와대 수석과 국회의원들을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끌어온 특혜 대출금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한보철강이라는 거함의 침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융권은 이미 “깨진 독에 물붓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고, 97년 1월 20일 제일은행이 250억원 상당의 물품대금을 갚아주는 것을 끝으로 한보철강에 대한 금융지원은 차단된다.
결과는 뻔했다. 당장 21일 돌아온 어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동안 밤을 새워 어음을 막아왔던 일선 자금부 직원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이른 귀가길에 올라야 했다.
한 세대를 풍미하며 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던 한보의 운명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운명의 5시간
정태수 회장이 죽어도 잊지 못할 운명의 97년 1월 23일. 그 날의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반전과 긴장, 경악 속에 진행됐다.
이날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한 금융기관대표자회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보그룹에 대한 자금지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자리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났고, 이는 국내 기업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 한다. 한보호가 침몰하던 그 날의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월 23일 오전 10시 10분. 이세선 제일은행 전무가 기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광식 행장은 아침부터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이 전무는 “정태수 총회장이 오늘 아침 주식담보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해왔다”며 “당진제철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완공시켜야 한다”고 서두를 열었다. 한보철강 처리가 제3자 인수 또는 은행관리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는 암시였다.
이는 97년 1월 8일 제일 조흥 외환 산업은행 등 4개 채권단 행장들이 정 회장에게 제시한 ‘주식양도 및 경영권 포기요구’가 사실상 받아들여졌다는 뜻으로, 한보철강 처리가 앞으로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날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한보철강 은행관리 유망”이라는 제목을 시커멓게 뽑았다.
제일은행은 이후 점심시간이 막 끝난 오후 1시 30분 “한보철강 처리와 관련 오늘 오후 4시에 금융기관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채권금융기관들에게 통보했다. 대부분의 채권기관들은 이를 정 회장의 경영권 포기 이후 한보철강에 대한 구제금융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 정도로 받아들였고, 관계자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결지인 제일은행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시간은 이미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표자회의는 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내가 술렁였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여기저기서 우려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시각 신 행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보에 파견한 내부직원의 전화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 회장의 주식포기 각서를 받으러 나간 직원의 전화였다. 신 행장은 포기각서를 인수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대표자회의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내용이 보고됐다. 한보측 변호사가 각서를 가져오겠다고 나간 후 수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기다려보자…”
신 행장은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4시를 한참 넘기고서도 반가운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기업여신 업무를 담당하는 박석태 상무가 먼저 나섰다. 기자들에게 “한보측이 각서 제출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고 전했다. 상황이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4시 25분. 술렁이는 대회의실에 신 행장이 들어섰다.
“주식담보 취득을 위한 절차가 완결되지 않아 대표자회의를 무기 연기한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졌고 분위기는 부도를 감지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이로부터 30여분 후 김진국 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이 주식현물이 가득 든 007가방을 들고 신 행장을 찾았다. 주위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김 본부장은 “주식을 제공하되 담보용이 아니며 단지 보관시키는 것일 뿐”이라며 신 행장에 보관증을 써줄 것을 요구했다. 주식담보를 생각하고 있던 신 행장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버럭 화를 냈고, 한보와 금융단간의 마지막 협상은 그렇게 무위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시간여쯤이 흘렀을까. 청와대 쪽에서 한보부도를 공식확인했다는 소문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신 행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이미 예감한 듯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그 날의 길고 길었던 5시간여 금융기관대표자 회의는 그렇게 마감됐다.
◆ INI스틸 당진공장으로 재출범
한보 부도의 파장은 치명적이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해태, 대농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줄을 이었고, 마침내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 기아그룹 부도로 이어졌다.
대기업 연쇄부도는 금융기관의 과다한 외화 차입과 맞물리면서 시장에 부도 공포감을 확산시켰고, 국가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외국인투자가들이 자금을 일시에 철수시키는 사태로 비화됐다. 결과론적인 분석이지만 한보 부도가 초유의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한보 부도는 정치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 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구속됐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이었던 김기섭씨가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사건의 파장을 뒤로 한 채 한보철강은 이후 법정관리를 거쳐 재활의 길을 걷는다.
7년여가 흐른 2004년 3월 22일. 한보철강 매각공고가 언론에 고지됐다. 총 15개 업체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고. 이 중 예비실사를 거쳐 최종 7개 업체가 응찰했다.
3년간 법정구속 후 출소해 있던 정태수 회장도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정 회장은 2004년 5월2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나 말고는 한보철강을 살려낼 사람이 없다”며 입찰 참여 기회를 줄 것을 호소했다. 한보철강을 부도낸 장본인으로서 그는 결자해지를 원했던 듯 싶다.
정 회장은 “한보철강을 인수하면 ▲3개월안에 외자유치로 5000억원 ▲3년안에 종친회 명의로 된 땅에 아파트를 지어 얻은 수익 1조원 ▲15년간 한보철강 수익으로 매년 3000억원씩을 상환해 한보철강 부채 6조1000억원을 모두 갚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정 회장의 입찰참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2004년 5월 27일. 한보철강 매각 주간사인 삼일회계법인은 현대차 계열인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을 한보철강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 발표했다. 이후 상세실사와 본계약 체결을 거쳐 한보철강은 결국 ‘INI스틸 당진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재출범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보철강 20년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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