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프로메타 연구소 최창환 소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국제금융시장도 요동을 치고 있다.
우선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일부를 국제결제망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했다. 제재를 받은 러시아는 이제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대금을 달러 또는 유로화로 결제 받기 어렵게 됐다. 당황한 러시아 시민들은 ATM기 앞으로 달려가 돈을 찾으려 아우성이다.
특히 주목할 건 암호화폐 시장이다. 러시아에선 비트코인이 10% 넘는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가 암호화폐를 이용해 경제제재를 피하지 못하도록 암호화폐 거래소들에 제재 동참을 요구했다.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암호화폐로 막대한 기부금을 모았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암호화폐는 전쟁 시 누구에게든 모두 필요한 존재임이 입증됐다. 미국의 암호화폐 거래소 크라켄의 CEO 제시 파월은 “암호화폐는 만인의 돈(People’s Money)이며 평화를 위한 무기”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암호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결정적인 장면 4개를 소개한다.
# 장면 1: 탈출수단이 된 암호화폐
‘도큐멘팅 비트코인’은 비트코인으로 국경을 벗어난 덴마크 기자의 얘기를 소개했다. 덴마크 기자 일행은 ATM 기기에서 모든 현금이 인출돼 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비트코인으로 중고자동차를 구매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투자하는 헬리오스 펀드의 웹마스터 역시 자산을 비트코인으로 바꿔 폴란드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평소 직장 동료의 조언을 따라 자산을 비트코인으로 채워 뒀다. 은행 ATM기가 닫히거나 봉쇄된 상태에서 비트코인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재산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국경을 넘은 지 2시간 뒤 전쟁 수행 능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은 국경을 넘는 것이 봉쇄됐다.
개입 지갑에 보관하고 키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의 허락 없이도 비트코인을 꺼내 쓸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의해 점령된 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황급히 공항을 통해 탈출했다. “차 4대 현금 꽉 채운 아프간 대통령, 못 실은 돈 활주로 버리고 탈출”이란 기사가 나왔다. 물론 달러다. 그가 비트코인을 가지고 있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 장면 2: 우크라이나 돕자… 암호화폐로 5,500만 달러 모금
우크라이나 전쟁은 역사상 첫 ‘암호화폐 전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전쟁 반대’의 깃발을 든 반러세력은 크립토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 암호화폐를 쏟아붓고 있다. 암호화폐를 다른 나라보다 먼저 합법화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암호화폐 분석업체 엘립틱(Elliptic)에 따르면, 러시아 침공 후 10만 2,000개 이상 주소에서 5,500만 달러가 넘는 암호화폐가 우크라이나에 기부됐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공개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USDT 지갑으로 들어온 암호화폐만 1,300만 달러다.
국가가 암호화폐로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도 큰 의미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스스로 지갑주소를 공개하고 지원을 요청해 암호화폐로 지원을 받은 첫 국가가 되는 것을 기꺼이 자임했다. 지난해 법정화폐로 받아들인 엘살바도르에 이어 또 다른 국가가 비트코인과 손을 잡은 것이다.
# 장면 3: 달러, 유로 무기화… 러시아, 스위프트 축출
러시아는 세계 2위 산유국이다. 유럽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40%에 달한다. 개전 초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서 이 부분을 고심했다. 러시아를 국제 결제망 스위프트에서 제외시키면 러시아도 고통스럽지만, 미국과 유럽도 국제 유가 상승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서방은 결국 러시아 중앙은행과 시중 은행을 스위프트망에서 축출했다. 러시아는 달러, 유로로 수출입 결제를 할 수 없게 됐다.
중국도 국제 금융 결제 분야에서는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를 서둘러 개발한 것도 달러 패권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중 하나다. 국제적인 금융 결제망을 누가 컨트롤하느냐가 세계 경제를 좌우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다.
# 장면 4: 암호화폐 거래소도 제재 동참하라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인 마이클 세일러는 “현재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돈으로 쓰이는 것은 비트코인뿐이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 제재로 인해 러시아의 달러화와 유로화 자산이 동결된 것을 빗댄 말이다.
미국은 러시아가 암호화폐를 이용해 제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암호화폐 거래소들도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중앙화 거래소들은 대부분 제재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런데 국가 권력이 정치적 이유로 특정 기업, 특정 개인에 대해 암호화폐를 제한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지난달 27일 우크라이나 미카일로 페도로프 부총리는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가 러시아 사용자 계좌를 차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 러시아 사용자들에 대해서도 사보타주(방해)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서방의 금융 제재가 러시아 국민 전체에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암호화폐라는 통로까지 완전히 막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크라켄 CEO 제시 파월은 “우크라이나의 요구는 합리적으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에 대한 깊은 존경에도 불구하고, 크라켄은 러시아 고객에 대한 계좌 동결은 법적인 요구가 아닌 한 시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 당국이 트럭 시위대를 막기 위해 금융 제재를 가한 상황을 예로 들었다. 캐나다는 정부의 백신 의무 접종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은행 계좌를 동결한 바 있다. 파월 CEO는 “캐나다에서 암호화폐는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금융 탈출구였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는 “우리의 임무는 레거시 금융 시스템 밖의 개인에게 다리(브리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며 “우리는 정부 또는 정치적 요소가 아닌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만인의 돈은 인류의 탈출 전략이며, 평화를 위한 도구이지, 전쟁을 위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전쟁이 낳은 또 하나의 논쟁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책임이 있는 러시아 정치인, 기업에 대해 크립토 커뮤니티가 자체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어떨까?
국가 권력이 아닌 자율 제재에 대해 디지털 자산시장 전문 매체 ‘블록미디어’가 독자 대상 설문 조사를 했다. 원칙적으로 찬성 31%, 원칙적으로 반대 29%, 제한적 찬성이 40%였다. 침공과 관련한 개인, 기업에 한정해서 암호화폐를 쓰지 못하게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제재를 ‘원칙적으로 찬성한다’와 ‘원칙적으로 반대한다’가 거의 비슷한 비율의 답을 보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암호화폐의 철학적 배경은 검열에 대한 저항, 즉 자유다. 국가 권력이 특정 개인에 대해 암호화폐 네트워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문에 대한 독자 의견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한 번이라도 선례를 남기면 좋지 않다.”
중앙화된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국가 권력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 동참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만약 미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 정부가 법원 판결이나 대통령 행정명령을 받아 시위주동자의 암호화폐 계좌를 동결하라고 하면 미국의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이 명령을 따라야 할까.
우크라이나 사태는 암호화폐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일부 중앙화 거래소들은 국가 권력의 요구에 따라 특정 계좌를 동결하는 전례를 남기게 됐다. 국가의 인허가에서 자유로운 탈중앙 거래소와 탈중앙 금융(디파이)이 ‘정치적 중립 이슈’에서 향후 중요한 대안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 본 기사는 한국일보에 5일자로 게재한 ‘기승전 비트코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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