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로 묶인 해외 자산으로 채무 상환 지시
남은 채무도 영향…디폴트 가능성 더 높아져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러시아가 16일(현지시간) 기한이었던 1억1700만 달러(1428억4530만원) 규모의 외화채권 채무 상환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떠넘겼다. 시장은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를 놓고 105년만의 외화 채권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지적을 이어가고 있다.
CNN비즈니스와 워싱턴포스트(WP)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날 채무를 문제 없이 상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건을 단 것이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제재로 인해 해외에 묶여있는 자산으로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국영언론 러시아투데이(RT)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채권자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했다”며 “우리는 돈을 가지고 있고, 지불을 했다. 이제 공은 미국 측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화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며 “미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지불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실루아노프 장관은 앞서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상황에 대해 “서방이 경제 제재라는 수단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디폴트를 유도하고 있다”며 ‘인위적 디폴트’라는 표현을 썼다.
또 비우호국가에 대해선 가치 폭락으로 무용지물이 된 루블화로 채권 이자를 갚겠다고 했다.
이를 미루어봤을 때 제재에 위기를 맞은 러시아가 보복을 위해 일부러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달러화 채권의 경우 채무 상환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30일 간의 유예기간을 부여한다. 이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디폴트에 대한 부담이 적어 이러한 조치를 내놓았다는 설명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뉴욕 은행 업무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 채권 보유자들 중 이자를 지급받은 경우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이전에 밝혔던 루블화로의 지급이 있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달러화 채권에 대한 이자를 달러가 아닌 루블화로 지급하는 것은 국제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루블화로 이자를 지급한다고 해도 디폴트로 간주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B’에서 ‘C’로 강등했다. 한 단계 아래인 ‘D’등급은 디폴트 단계를 의미한다.
무디스 역시 “허가가 나지 않는 채권에 대한 루블화 지불은 우리의 정의에 따라 채무불이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디폴트 결정을 내리기 전에 특정 거래의 사실과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탰다.
러시화 채권 중 일부는 특정 상황에서 루블화 지불을 허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시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치가 떨어진 루블화로 이자를 지급하는 것은 투자자들의 돈이 크게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루블화 지불이 가능한 채권이라도 상황은 복잡해질 수 있다.
국제금융연구소(IIF) 부소장 클레이 로워리는 “루블화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 생각엔 법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현 상황이 루블화로 이자를 갚아야 하는 특수 상황인지,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자초한 것인지를 법정에서 해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러시아는 국채와 관련해 이날 1억1719억 달러를 제외하고도 6억여 달러를 상환해야 한다. 오는 21일 6563만 달러, 28일 1억200만 달러, 31일 4억4653만 달러 등이다. 다음달 4일에는 21억2900만 달러 상환이 예정돼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 국채에 ‘교차 디폴트’ 조항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조항에 따라 한 개 채권이 디폴트 처리되면 나머지 다른 국채도 디폴트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공식적인 디폴트 선언은 되지 않았다.
러시아가 디폴트 선언을 할 경우 신흥시장 채권에 투자하는 펀드 등 채권 보유자들은 심각한 손실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WP는 디폴트가 발생하면 채권단이 최소 35%에서 최대 65% 가량의 투자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이번 제재들로 이미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다. 이로 인해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 및 금융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투자회사 TCW의 신흥시장 그룹 매니징 디렉터 블레이즈 앤틴은 W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제재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세계 경제 및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고 평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mstal0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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