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프로메타 연구소 최창환 소장] 암호화폐 시장이 참담하다. 2018~2019년 극심한 겨울(크립토 윈터)보다 심하다. 시가총액 2조 달러를 웃돌던 시장은 8,000억 달러대로 쪼그라들었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와 금리 인상이라는 악조건 속에 테라 사태가 몰고 온 후폭풍이 거세다. 암호화폐를 담보로 대출해주고, 이자 장사를 했던 업체들이 연쇄 부도 위기에 몰렸다.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지는 것 이상으로 ‘탈중앙’이라는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 더욱 걱정이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탄생부터 12년간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암호화폐는 늘 실패와 도전을 반복했다. 역사가 전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 전진을 위한 고통
이 칼럼에서 한 번 얘기했던 아래 그림을 봐주시면 좋겠다.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깃발을 든 자유의 여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다. 여신과 전진하는 군중들의 발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부랑아, 농민, 노동자, 퇴역 군인, 시민 등. 이들이 어떤 강한 논리나 지식으로 혁명의 대의에 참여했을까? 그렇지 않다. 켜켜이 쌓여 있는 부조리와 모순들이 이들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전사로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 암호화폐 시장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혁명 전선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고통과 유사하다. 그 위에 새 살이 돋고, 새로운 금융, 새로운 경제가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암호화폐 시장의 모든 것을 혁명이란 이름으로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어떤 부분이 위기이고, 실패일까? 단적으로 테라 사태는 너무나 급속한 확장이 가져온 참사다. 모든 새로운 것은 위험을 잉태한다. 그 위험을 간과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고민은 이렇게 시장이 흔들릴 때 대원칙이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
지금 암호화폐 시장을 휩쓸고 있는 연쇄 청산, 부도 위험은 우리가 겪은 1997년 IMF 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너무나 유사하다. 테라 사태가 발발한 직후 셀시우스라는 암호화폐 대출업체가 고객 자금 인출을 중단했다. 셀시우스는 테라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앵커 프로토콜이라는 디파이(DeFi·탈중앙금융)에도 자금을 맡겼고, 다른 유사한 디파이에도 돈을 굴렸다.
셀시우스는 고객이 맡긴 돈을 디파이에 예치해 놓고 이자를 받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디파이에서 다시 대출을 받아 또 다른 디파이를 통해 이자를 받는 ‘레버리지’ 장사를 했다. 부동산 시장에서 봐온 갭투자, 2008년 금융위기의 단초가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연상시키는 고위험 투자를 한 것이다. 암호화폐 가격이 갑자기 떨어지자, 담보 가치가 떨어졌고, 셀시우스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대출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결국 끌어다 쓴 고객 자금을 날릴 처지가 됐다.
# 시스템을 지킬 것이냐, 원칙을 지킬 것이냐
셀시우스가 무너지자, 유사한 레버리지 투자를 한 암호화폐 투자 펀드들도 위기에 처했다. 스리애로캐피털이라는 펀드도 똑같은 방식의 레버리지 투자를 했다가 파산 위기에 물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 청산과 파산이 암호화폐 시장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셀시우스나 스리애로캐피털은 기존 금융회사들처럼 암호화폐를 담보로 투자를 했지만, 순수 디파이에서도 우려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디파이는 원래 중간자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 점이 최대의 강점이고, 기존 금융의 문제점을 뛰어넘을 미래의 금융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디파이가 스스로 개입을 선언한 사건이 벌어졌다. 탈중앙, 중간자 없는 금융이라는 원칙을 지킬 것이냐, 연쇄 청산의 위험을 일단 벗어나 시스템 전체를 구할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내몰린 것이다.
# “고래 지갑을 직접 관리하겠다”
솔라나라고 하는 블록체인이 있다. 솔라나 체인에서 가동하는 솔렌드라는 디파이 프로젝트가 암호화폐 시장 전체에 충격을 줄 결정을 내렸다. 솔렌드는 솔라나 코인을 담보로 예치하면, 다른 암호화폐를 대출해주는 디파이다. 솔렌드에는 엄청나게 큰 고객이 하나 있었다. 예치 금액의 95%, 대출 금액의 88%를 이 고객이 차지했다. 암호화폐 시장이 안정적이고, 좋을 때는 이 대형 고객은 VVIP 고객이었다. 그런데 솔라나 코인 가격이 떨어지자 셀시우스와 똑같은 위험이 발생했다.
솔렌드를 운영하는 솔렌드 랩스는 해당 큰손(고래)과 연락을 취했다. 위험도가 너무 크니, 예치와 대출을 줄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 자체도 디파이 취지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디파이는 프로그램에 따라 누구든 코인을 맡기고, 대출을 할 수 있기 떄문에 누가 나서서 줄여라 말아라 해서는 안 된다.
고래는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솔렌드 랩스는 해당 고래 계좌(지갑)를 트위터에 공개하고, 너무 위험이 크니 다른 고객들은 조심하라는 공지까지 올렸다. 다른 사람의 통장 내용을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솔렌드 랩스는 심지어 솔라나 코인 가격이 22.27달러로 떨어지면 이 지갑 주인이 청산을 당한다는 사실도 공표해버렸다.
그래도 고래가 포지션을 줄이지 않자, 솔렌드 랩스는 긴급 제안을 내놓는다. 해당 고래의 지갑을 몰수해서 자신들이 청산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탈중앙 이념에 맞지 않는 이 제안은 “오직 솔렌드 시스템과 솔라나 블록체인 시스템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충정”이라고 강변했다. 솔렌드의 이 제안은 우여곡절 끝에 철회됐다. 그 사이 솔라나 코인 가격이 오르기도 했고, 암호화폐 업계의 비난도 컸기 때문이다.
# 암호화폐 발전을 위한 인간학
솔렌드 해프닝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철학에서 출발한다. 블록체인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암호화폐 비트코인은 그래서 운영 주체가 없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개개인이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디파이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그런데 솔렌드가 그 원칙을 깨고 네트워크, 시스템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개입을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시스템이 살아나더라도 솔렌드는 더 이상 디파이는 아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짤 때 인간의 욕심까지 제어하는 그런 코딩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디파이도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일부 힘있는 사람들이 만든 금융시스템을 분산을 통해 더 나은 시스템으로 만들겠다는 블록체인혁명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분산 정신에 공감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 부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투자했던 많은 사람들과 프로젝트들은 지금 많은 상처를 입고 커다란 위기에 처해있다. 고난에 처한 암호화폐 프로젝트와 투자자들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과 힘이 찾아들기를 고대한다.
* 본 칼럼은 6월 25일자 한국일보 기승전 비트코인 칼럼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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