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가치 하락폭, 위안화·엔화보다 더 커
이창용 “다른 국가도 함께 약세…금융위기와 달라”
전문가들 “아직은 아니지만…금융위기 발생 배제 못해”
[서울=뉴시스] 류난영 기자 = 원·달러 환율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1370원을 넘어서면서 또다시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원화 가치는 달러화를 비롯해 중국 위안화나 일본 엔화 보다도 더 큰 폭 하락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행보에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중국 도시봉쇄 우려, 유럽발 에너지 위기, 국내 무역 적자 확대 등 악재가 한꺼번에 겹친 영향이다.
6일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전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장대비 8.8원 오른 1371.4원에 마감했다. 장 마감 기준으로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4월 1일(1379.5원) 이후 13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1370원을 넘어섰다. 장중 한때 1375.0원까지 올라갔다.
환율은 최근 3거래일 동안 무려 33.8원이나 올랐다. 또 지난달 16일부터 23일까지 6거래일 간 43.1원 뛰었다. 환율이 단기간에 이 정도로 큰 폭 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환율이 1370원을 돌파하면서 금융시장에서는 1997년 발생했던 외환위기가 다시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당시 모두 환율이 급등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7년 12월 16일 ‘자율변동 환율제’ 채택 이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것은 1997~1998년 외환위기,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역대 두 차례에 불과하다.
글로벌 외환위기가 진행중이던 1997년 12월 23일에는 원·달러 환율이 1962.0원까지 치솟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던 2009년 3월 2일에는 1570.3원까지 올랐다.
더 큰 문제는 원화 가치 하락 속도다. 지난달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의 ‘잭슨홀 미팅 연설’ 이후 원화 가치가 미 달러화 강세에 비해 더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뉴시스 확인 결과, 전날 장 마감 기준으로 지난달 22일 대비 2주 새 원화 가치는 2.35%나 하락했다. 이는 같은 기간 달러인덱스 기준 달러 가치 상승폭(1.01%)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더 큰 폭 하락한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를 고수하고 있는 일본 엔화(-2.13%)나 중국 위안화(-1.28%) 보다도 원화 절하폭이 더 크다. 에너지 위기로 20년래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이고 이는 유로화(-0.46%)보다도 더 큰 폭 하락했다. 영국 파운드화(-2.63%)와 비교해서는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 우려와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도시봉쇄로 중국 위안화가 약세를 보이고 있어 원화가 ‘프록시 통화’로 작용하는 등 글로벌 악재가 커진 영향이다. ‘프록시 통화’는 유동성이 적어 주변 통화들과 동조화 되는 통화를 말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으로 의존도가 높아 원화가 위안-달러 환율 흐름과 비슷한 동조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중국 경기 둔화로 우리나라의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치로 치솟으면서 원화 약세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기술기업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어 향후 미중 갈등에 따른 위안화 약세로 이어지면서 원화 약세는 더 커질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8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6.6% 늘어난 566억7000만 달러로, 수입은 28.2% 늘어난 661억5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이에 따른 무역수지는 94억7000만 달러 적자를 나타냈다. 이는 5개월 연속 적자기록으로 2007년 12월~2008년 4월 이후 처음이다. 적자액도 1956년 무역통계 작성 이후 66년 만에 최대치다. 기존 최고 기록인 올해 1월(49억500만달러)의 두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원화 약세에 대해 “미 연준의 금리 인상에 대한 기대 변화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중국 경기침체 우려, 중국과 대만의 지정학적 긴장 고조에 따른 위안화 약세,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 지속 등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유럽발 에너지 위기도 원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유럽으로 송출하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의 폐쇄를 연장했다. 이에 따라 유로화 가치가 달러와 1대 1을 의미하는 패리티(등가)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서 달러 강세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은 환율 상승이 미국의 고강도 긴축 영향으로 외환시장 유동성 문제나 신인도 문제, 외환보유액 부족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닌 만큼 1997년이나 2008년 사태가 반복할 것으로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올라가고 있는 현상이 1997년이나 2008년 우려와 중복돼 나오고 있지만 현재 상황은 우리나라 통화만 절하되는 게 아닌 달러 강세로 다른 주요 국가의 환율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며 “과거와 달리 한국은 채무국이 아니라 순채권국이기 때문에 유동성이나 신용 위험보다는 환율 상승에 따른 물가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또 “미국과 상설 통화스와프를 하고 있는 유로존 국가들 통화도 약세를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아직까지는 금융위기나 외환위기를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는 상황이 이어질 경우 위기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외환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불안 요인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도 “최근 원화 약세는 미 연준의 금리인상 사이클 가속화, 유로존의 에너지 위기, 중국 경기 침체 등 우려에 따른 것인 만큼 아직까지는 과거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그러나 “우리가 중국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데다, 최근 반도체 업황도 좋지 않고, 무역 적자폭 확대 등 악재가 겹쳐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위기로 갈 수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한다”며 “환율이 1400원을 돌파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 연준이 연말까지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것으로 보이고 우리나라 무역수지도 개선될 가능성이 낮아 무역수지 악화,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 등으로 환율이 1400원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외환당국의 달러 매도시장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줄어들 경우 다른 국가들에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처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외환위기가 다시 발생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you@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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