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James Jung 기자] “이런 말을 해서 매우 미안하지만, 영국이 스스로 가라앉는 이머징 마켓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 TV에 출연해 한 말입니다. 이 말이 영국한테 미안한 것인지, 이머징 마켓 국가들한테 미안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엉뚱한 경제정책
서머스 전 장관은 영국이 터키처럼 엉뚱한 경제 정책을 들고 나왔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터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고집으로 인플레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데도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고금리가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묘한 논리를 폅니다.
영국도 새롭게 선출된 리즈 트러스 총리의 지휘하에 강력한 감세 정책, 성장주의 정책을 내놨습니다. 쿼지 콰텡 재무장관은 1972년 이후 가장 큰 감세 패키지를 발표하고, 영국의 GDP 성장률을 2.5%로 만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표가 나오자마자 파운드 가치가 2% 급락했습니다. 영국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습니다.(채권 가격 하락) 영국 중앙은행 영란은행이 다음 주에라도 긴급 회의를 열어서 기준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비상 처방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영란은행은 이번 주 기준 금리를 인상했습니다. 물가를 잡으려고 돈줄을 조인거죠. 그런데 곧바로 영국 정부는 경제 성장을 위해 세금을 깎겠다고 엇박자 발표를 한 겁니다.
# 40년 전 대처리즘 부활하나?
트러스 총리는 영국의 세 번 째 여성 총리입니다. 첫 여성 총리로서 1980년대 영국병을 치유한 것으로 유명한 대처 전 총리를 닮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대처 전 총리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노조를 억압하고, 친 기업 정책으로 성장을 장려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소련을 무너뜨리고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입니다. 경제 정책으로는 ‘공급주의 이론’에 근거한 성장을 철학으로 합니다. 이를 대처리즘이라고 합니다.
공급주의는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고, 세금을 줄이면, 기업들이 적극 활동을 해서 경제가 전체적으로 좋아진다는 이론입니다.
트러스 총리의 경제 정책이 이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 5년간 250조원 감세
트러스 총리의 경제 정책은 대규모 감세를 기반으로 합니다.
– 최고 소득세율 45%에서 40%로, 최저 세율도 19%로 하향
– 법인세 인상 취소, 가계에 부과하는 국가보험료율 1.25%로 하향
– 취등록세 기준 상향, 부동산 과세부담 경감
앞으로 5년 간 1600억 파운드(250조원)의 세금을 덜 걷도록 돼 있습니다. 역으로 민간에 이 만큼의 돈이 남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쓸 돈을 줄인 것도 아닙니다. 트러스는 취임 이틀째인 지난 8일 가계 에너지비를 가구당 연 160만원 씩 2년 간 보조하는 안을 발표했습니다. 최소한 1000억 파운드(160조원)를 영국 정부가 부담해야 합니다.
들어오는 세금 수입은 줄이고, 나가는 지출은 늘렸습니다. 영국 정부의 빚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채권 수익률이 급등했습니다.
# 트러스 총리의 도박…영국, 1976년 IMF 구제금융 받아
콰텡 재무장관은 영국 경제가 좋아지고, 성장률이 올라가면 부족한 세수는 저절로 맞춰진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전형적인 공급주의 경제 철학입니다.
공급주의는 일종의 도박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제정책입니다. 세금을 줄이면 정부 재정이 악화하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세금 수입은 분명하게 줄어드니까요.
그런데 줄어든 세수만큼 민간 경제가 활성화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경제가 정말 좋아지고, 그래서 저절로 세수가 다시 늘어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영국의 성장률은 1998년 이후 평균 2~2.7% 입니다. 영국의 예산책임국 전망에 의하면 2023~2026년 성장률은 평균 1.8% 입니다. 트러스 총리는 이걸 2.5%로 끌어올리겠다고 합니다. 과감한 감세를 통해서요.
영국은 1972년에도 지금과 유사한 대규모 감세 정책을 실행한 적이 있습니다. 애드워드 히스 총리 시절입니다.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까지 받는 처지가 됩니다.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었습니다.
# 정책 시기가 좋지 않다
트러스 총리가 때를 잘못 골랐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위기 국면이고,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문제인 상황에서 성장 정책을 끌고 나온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겁니다. 지금은 성장이 아니라 분배(물가)가 중요하다는 거죠.
영란은행이 금리 인상을 한 직후에 정부가 돈을 더 풀겠다고 발표했으니, 시장은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약해집니다.
도이체방크의 외환분석가 조지 사라벨로스는 “투자자 신뢰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영란은행이 긴급 회의라도 열어서 금리를 올리고, 파운드 급락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서머스 전 장관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긴축 정책으로 물가를 잡아도 모자랄 판에 돈을 풀겠다는 카드를 꺼냈다는 겁니다. 선진국 영국이 개발도상국 터키나 하는 정책을 쓴다는 것이죠.
총리 관저에 입주한 직후 여왕 국상을 당한 트러스 총리가 야심차게 내놓은 경제 정책이 출발부터 시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않고, 40년도 더 된 낡은 부대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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