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정옥주 기자 = 글로벌 긴축 여파와 경기침체 우려 등으로 가뜩이나 위축된 자금조달 시장이 강원도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미상환 사태까지 겹치며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채권 시장에 혼란이 가중되면서 기업들의 자금 경색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금융당국도 특단의 대책을 내놓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강원도 레고랜드 ABCP 보증채무 미상환 사태가 불거진 이후 기업들의 ‘자금줄’인 회사채 시장에 경색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는 강원중도개발공사(GJC)가 지난 2020년 레고랜드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해 아이원제일차를 설립, 2050억원 규모의 ABCP을 발행하면서 시작됐다.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섰는데, 최근 GJC가 채권을 상환하지 못했고 강원도는 보증 의무를 이행하는 대신 법원에 GJC에 대한 회생절차를 신청하며 혼란이 일었다. ‘아이원제일차’는 지난 5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레고랜드 ABCP 2050억원은 국내 증권사 10곳, 자산운용사 1곳이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양정숙 무소속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신한투자증권, IBK투자증권 등 증권사 10곳과 멀티에셋자산운용 1곳이 편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 투자는 모두 법인투자자 계정으로 ABCP를 편입, 개인 투자자 손실 우려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이번 레고랜드 사태 여파가 회사채·CP 등 단기자금 시장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단 점이다. 가뜩이나 불안한 시장에 지방자치단체 보증으로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ABCP까지 부실이 나면서 회사채와 CP 금리가 크게 오르는 등 시장 전반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 시장 차환 리스크가 확대되고, 회사채 발행 시장 전반에 심리가 냉각되고 있다”며 “우량 등급 수요예측에서도 일부 트랜치에서 수요를 채우기 어려울 수 있어 발행을 미루는 것으로 알려졌고, 특히 PF ABCP 기피 현상으로 차환 금리가 크게 오르면서 시장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회사채 수요가 급감하며 발행시장이 급격하게 쪼그라드는 모습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공모회사채 수요예측 규모는 총 65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3조5000억원(39%) 감소한 5조5000억원에 그쳤다. 경쟁률은 전년 동기(348%) 대비 152%포인트 감소한 196%를 기록했다.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한 이후 지난 3~20일 발행된 회사채 규모는 1조3562억원으로, 지난달 5~20일 회사채 발행액(2조4882억원)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레고랜드 여파는 우량기업 자금조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최근 들어 신용등급 AA 수준의 우량 채권마저 미달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7일 JB금융지주가 AA+신용등급과 금리메리트를 내세워 1000억원 규모의 공모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예측에 나섰지만 절반이 넘는 620억원이 미매각되며 완판에 실패했다. 이에 앞서 SK렌터카도 지난 13일 8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했으나, 모집금액 400억원인 1.5년물에 100억원이 몰리는데 그쳤다.
금투협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16건(9500억원)의 미매각이 발생해 미매각율은 14%에 이른다. 전년 동기 대비 13%포인트 뛴 수치다. 특히 A등급에서 8건(6500억원)의 미매각이 나와 미매각율 58%로 집계됐다.
회사채 투자심리를 가늠할 수 있는 ‘신용스프레드’ 확대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고채 3년물과 회사채(AA-등급) 3년물 간 차이인 ‘신용스프레드’는 14일 기준 1.14%포인트로 벌어져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9월 이후 13년만의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신용스프레드는 국고채와 회사채 사이 금리 격차로 이 수치가 커지면 시장이 회사채 투자 위험을 높게 본다는 것을 뜻한다.
한은은 최근 신용스프레드가 확대된 것은 금리상승 국면에서 신용도와 유동성이 낮은 신용채권의 투자수요가 크게 위축된 데다 한전채·은행채 등 초우량물 발행 확대, 이에 따른 신용채권 간 ‘구축 효과’ 등 공급요인이 가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조 규모 채안펀드 투입 등 긴급 안정대책 내놔
이처럼 기업들의 자금조달 환경이 악화되자, 금융당국도 전날 지원책을 내놓고 진화에 나섰다.
우선 발행시장에서 직접 회사채와 CP를 매입하는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카드를 다시 한번 꺼냈다. 단 시장 가격 왜곡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추가 출자 없이 기존 출자금액에서 남아 있는 1조6000억원을 활용해 매입을 재개하고, 캐피탈콜(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실제 투자 시 필요 자금을 납입하는 방식)도 즉각 준비키로 했다.
이와 함께 증권사·여전사 등의 유동성 상황을 면밀히 보고, 우선 한국증권금융을 통한 유동성 지원 등도 적극적으로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 은행권에서 요구한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정상화 조치도 6개월 유예키로 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85%로 완화했던 LCR 비율을 정상화하기 위해 은행들은 LCR을 오는 12월까지 92.5%로 높여야 하는데, 이를 내년 6월 말까지 유예하는 것이다. 최근 은행들이 LCR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채 발행을 대거 늘리면서 회사채 시장 불안에 일조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다만 일각에서는 현재 단기자금시장 경색 원인이 근본적으로는 부동산 경기 냉각에 따른 부동산PF의 신용 위험 증가에 대한 우려인 만큼, 채안펀드 가동 등 단기적인 유동성 공급 조치로는 한계가 있단 지적도 나온다. 한은도 주요국 통화긴축 강화 등 금융시장의 높은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PF-ABCP 시장 불안 등으로 단기간 내 신용채권시장의 위축이 크게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단기자금시장 경색의 원인은 표면적으로 강원도 보증채무 불이행 이후 부동산 PF 관련 채권에 대한 패닉에 가까운 기피 현상에 따른 유동성 고갈이 문제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동산 경기 냉각에 따른 부동산PF의 신용 위험 증가가 내재해 있다”며 “유동성 공급을 통해 단기 자금시장 경색이 풀리고 나면 PF 사업장들의 사업성 평가를 통한 옥석 가리기를 진행해 정상적인 PF ABCP에는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은기 삼성증권 수석연구원은 “최근 단기자금시장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정책의 우선 순위 입장에서는 채안펀드의 규모보다는 증권사 유동성 공급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다고 판단된다”며 “정책자금으로 PF-ABCP를 직접 매수해주기는 공적자금의 성격상 어려운 만큼, PF-ABCP 매입 확약으로 유동성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중소형 증권사를 지원하면서 단기자금시장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레고랜드 관련 이슈 이후 확산되는 시장 불안요인에 대해 면밀히 모니터링 중”이라며 “부동산 PF 시장과 관련해 시장불안이 확산되지 않도록 필요시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조속히 마련·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channa224@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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