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서방의 금융시장이 고금리 시대를 맞아 투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자금이 넘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전 세계 투자금 시장에서 현금인출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5년 전 미 금융기관 임원들이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회의 참석을 대거 취소했다. 당시 미 워싱턴포스트(WP) 객원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 배후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지목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해 “사막의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사우디의 국제 경제 회의는 참가비가 1만5000 달러(약 2000만 원)에 달하는 데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국제 영향력 확대를 갈망하는 중동의 왕정국가들이 세계 금융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유가 인상으로 자금 수입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고금리로 자금 확보가 어려운 서방의 금융 시장과 대조적이다.
두 나라의 국부펀드가 전 세계 사모펀드, 벤처 캐피탈, 부동산 투자회사의 현금인출기가 된 것이다.
◆“중동 자금 시장, 미 골드 러시 방불”
두 나라의 인수합병 시장 참여가 급증하고 있다. 아부다비 펀드가 투자자문사 포트리스를 20억 달러 이상에 인수했고 사우디 펀드는 스탠다드차터드 항공 금융부문을 7억 달러에 인수했다.
UAE 대통령의 동생 타흐눈 빈 자이드 휘하의 기업과 펀드들이 스탠다드 차터드와 투자은행 라자드 인수에 뛰어들었다. 영국의 헬스케어 기업을 12억 달러에 사들였고 콜럼비아 식품 대기업의 지분 일부를 60억 달러에 인수했다.
아부다비의 컨설팅 회사 제이드 어드바이저스의 페테르 예더스텐 설립자는 “중동 러시다. 과거 미국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한다. 다른 곳에선 자금을 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중동을 방문하는 펀드 매니저들이 국부펀드 건물의 대기실에서 기다리기 일쑤다. 아부다비의 포시즌스 호텔 로비에는 실리콘 밸리와 뉴욕의 펀드 매니저들을 항상 볼 수 있다.
다음 달 리야드에서 열리는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 회의에 자금 사냥꾼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사우디 공공투자펀드(PIF)가 주최한 회의에 미국 최대 투자사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즈만과 브리지워터사 설립자 레이 달리오가 주빈으로 참석하고 플로어에도 여러 벤처캐피털 임원들과 FTX의 샘 뱅크먼 프리드가 참가했었다.
안드리센 호로위츠 벤처캐피털의 벤 호로위츠 파트는 올 봄 열린 PIF 회의에서 사우디가 모함마드 왕세자가 설립자인 “스타트업 국가”라고 묘사했다.
◆사모펀드 시장의 큰 손들
두 나라는 특히 사모펀드 시장에서 큰 손이다. 사우디 PIF 회의에서 약정된 투자금이 2021년 330억 달러에서 560억 달러로 늘었다. 아부다비도 지난해 자본투자가 2배로 늘어난 180억 달러에 달했다.
사모펀드 대기업 TPG, KKR, 칼라일 그룹 등의 임원들이 중동의 투자 관심이 높은 반면 다른 나라들은 줄었다고 전한다. 고금리로 인해 주식과 채권에서 손실을 본 각국의 연금 펀드와 대학펀드 등 기존의 투자자들이 위축됐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 미국의 벤처 캐피털회사 투자금은 2021년 상반기 740억 달러의 절반도 안된다. 전 세계적으로도 지난해 사모펀드 투자금이 10% 줄어든 1조5000억 달러였다.
사우디와 UAE가 자금시장에서 큰 역할을 하게된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크게 올라 두 나라 국부펀드의 수입이 수백억 달러 증가했다. 따라서 유가가 하락하면 이들의 투자도 급격히 위축될 수 있다.
둘째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UAE 최고 지도자들의 국제적 위상 강화 노력을 들 수 있다. 이들이 국제정치와 금융시장, 스포츠 부문에 국부펀드의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국내 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있다.
한편 재러드 쿠슈너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사위와 재무장관 출신 스티븐 므누신이 사우디, UAE, 카타르로부터 수백억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등 톡톡히 덕을 보고 있다.
미국의 투자사들이 중동에 사무실을 대거 설치하고 있다. 블랙록은 걸프 지역 인프라 건설 투자 자금 유치를 담당하는 지사를 리야드에 마련할 계획이다.
◆대형 투자사들 중동에 대대적으로 지사 설치
밀레니엄 매니지먼트가 2020년 두바이에서 사무실을 차린데 이어 CVC 캐피털 파트너스, 엑소더스포인트 캐피털 매니지먼드 등 뉴욕의 사모펀드들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유럽의 티케하우 캐피털과 아르디안도 아부다비에 진출했으며 미국의 대체투자사 프레티엄은 두바이에 현지 전문가를 채용했다. 달리오는 아부다비에 개인 투자사인 달리오 패밀리 오피스 지사를 설립했다.
소프트뱅크 투자자로 유명한 라지브 미스라는 아부다비의 여러 투자펀드에서 60억 달러의 투자금을 확보한 뒤 런던의 사무실을 UAE로 옮기는 중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타이거 글로벌의 벤처캐피털 부문은 투자금 유치 목표를 채우지 못해 계속 목표를 줄이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투자 회사들은 손실을 내면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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