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김형섭 기자 =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주가연계증권(ELS)의 내년 상반기 대규모 손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직 손실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대로라면 수조원대의 투자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상품을 대거 판매한 은행이 충분한 위험을 고지했느냐와 관련한 불완전판매 논란이 쟁점이 되고 있다. 투자자 분쟁조정과 소송 등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국내 5대 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ELS 가운데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규모는 약 8조4100억원에 달하며 홍콩 H지수가 현 수준에 머물 경우 3조원 규모의 손실이 예상되고 있다.
ELS는 특정 주가지수에 연동된 증권으로 만기까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약속된 수익률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통상 코스피200, S&P500, 홍콩H지수 등 국가별 대표지수가 가입 당시보다 절반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으면 수익률이 보장되는 구조여서 중위험 상품임에도 은행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실제로 전체 ELS 발행량 중 과반이 은행 신탁 상품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문제는 홍콩H지수가 2021년 상반기 고점 대비 반토막나면서 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 상품부터 대규모 원금 손실 발생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홍콩H지수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중국 국영기업 종목을 추려 산출한 지수로 지난 2021년 2월 1만2000선을 돌파한 뒤 하락을 거듭해 현재는 6000선마저 무너진 상태다.
금융권에서는 홍콩H지수가 고점이었던 2021년 상반기에 발행된 홍콩H지수 관련 ELS 중 40% 가량이 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손실 위기에 직면한 투자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자는 커녕 원금까지 날릴 위기에 처한 가입자들은 은행으로부터 이토록 위험한 투자라는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한 채 거액을 투자해 큰 손실을 보게 생겼다며 불완전판매를 주장하고 있다.
아직 만기가 도래하지 않아 손실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판매사나 금융감독원 등에 불완전판매로 민원을 제기하는 가입자들이 늘고 있다. 투자자 모임 등을 통한 집단소송 준비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불완전판매 여부가 이번 홍콩H지수 ELS 사태에서도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셈이다. 불완전판매란 판매자가 수익과 손실 관련 내용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일컫는다.
2008년 키코(KIKO) 사태, 2013년 동양그룹 기업어음(CP) 사태, 2019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등 고객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힌 금융 사태 때마다 불완전판매 여부가 문제가 됐었다.
하지만 은행들은 “홍콩H지수 ELS 상품과 관련한 충분한 설명을 했고 가입자가 이를 확인하는 녹음도 있다”며 불완전판매는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은행들은 지난 2019년 DLF 사태와 2020년 사모펀드 사태 등을 거치며 강화된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적용을 받았다.
이에 따라 판매 과정에서 녹취를 강화하고 AI를 통해 상품에 대한 필수 설명 등을 이행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게 은행권의 입장이다.
그러나 은행 측의 상품 설명이 요식행위에 그쳤을 뿐 소비자에게 상품의 위험성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했다면 불완전판매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은행들이 상품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령층을 대상으로 ELS를 대량 판매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비판을 사고 있다. 노후 자금을 맡기러 온 고령층에게 주가 폭락시 원금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 있는 위험 상품을 권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 고령층 가입자들 사이에서는 “AI의 상품 설명이 너무 빨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은행과 증권사 등 판매사에 대한 전수조사에 들어간 금감원도 불완전판매 여부를 집중적으로 따질 예정이다. 특히 금감원은 금소법상 ‘적합성’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투자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팔았는지의 문제다. 안전 투자 성향의 고객에게 원금 전액 손실이 가능한 ELS를 판매했다면 위반에 해당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29일 기자들과 만나 “묻기도 전에 굳이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가 다 마련됐다는 등 운운하면서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저희에겐 자기 면피 조치를 했다는 식으로 들린다”며 ELS 판매 은행들을 질타했다.
그는 “이런 고위험·고난도 상품이 다른 데도 아닌 은행 창구에서 고령자들한테 특정 시기에 고액이 몰려 판매됐다는 것만으로도 과연 그 적합성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에 대해 한번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 점이 있다”고 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도 전날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ELS가 문제가 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품이기 때문”이라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불완전판매다. 상품 구조에 대해서 사는 사람은 물론 파는 사람 조차도 모르고 판매한 것이 상당히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만일 향후 손실이 현실화되고 금융당국 점검 등을 통해 판매사의 불완전판매가 밝혀진다면 가입자들은 투자금을 돌려받을 길이 열린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불완전판매가 확인될 경우 판매사에 최대 80%의 배상 책임을 물리고 있다.
이번 사태는 은행의 고위험 상품 판매 적절성으로도 번질 전망이다. 불완전판매 여부와 별개로 주로 원리금 보장 상품을 취급하는 은행에서 고위험 파생상품을 판매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다.
다만 은행의 고위험 상품 취급을 아예 금지하는 것은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령층에 대해서만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를 전면 금지하는 식의 대책이 고려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과거 금융당국은 일정 연령 이상에 대해서는 녹취 의무와 숙려기간을 부여하는 식으로 고령층에 별도의 고위험 상품 판매 규제를 둔 적도 있다.
이같은 제도개선에도 불구하고 고령층에 대한 불완전판매는 끊이지 않고 있어 향후 ELS 등 고위험 금융상품에 대한 제도개선시 고령층에 대한 고위험 상품 판매 금지도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이 원장도 “노후 보장 목적으로 만기 해지된 정기예금을 재투자하고 싶어하는 70대 고령 투자자에게 수십 퍼센트의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고위험·고난도 상품을 권유하는 것은 설명 여부를 떠나 권유 자체가 적정했는지에 대해 적합성 원칙상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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