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신호경 한지훈 민선희 기자] 올해 들어 불과 한 달여 만에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흐름과 연동된 주가연계증권(ELS)의 손실 규모가 5천억원을 넘어섰다.
우려대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은행 등 판매 금융기관에 ‘배상안’ 또는 ‘책임 분담안’을 요구하는 투자자와 금융 당국의 압박 수위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은행권도 법무법인들과 배상안을 검토하는 가운데, 결국 판매 과정에서 ‘적합성 원칙’ 위반 사례를 스스로 얼마나 폭넓게 인정할지에 따라 배상 범위나 수준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9천733억 만기에 손실 5천221억원…평균 손실률 53.6%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이 판매한 H지수 기초 ELS 상품 가운데 올해 들어 지난 7일까지 모두 9천733억원어치의 만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고객이 돌려받은 돈(상환액)은 4천512억원뿐으로, 평균 손실률이 53.6%(손실액 5천221억원/원금 9천733억원)에 이른다.
H지수가 5,000 아래로 떨어진 지난달 하순 만기를 맞은 일부 상품의 손실률(58.2%)은 거의 60% 수준이다.
9일 현재 H지수(5,306) 역시 2021년 당시 고점(약 12,000)의 절반을 밑돌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전체 15조4천억원, 상반기에만 10조2천억원의 H지수 ELS의 만기가 도래하는 만큼, H지수가 큰 폭으로 반등하지 못하고 현재 흐름을 유지할 경우 전체 손실액은 7조원 안팎까지 불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5대 은행 홍콩H지수 ELS 손실 규모(단위 : 억원,%) ※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자료 취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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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만기도래 원금 | 손실액 | 손실률 |
2023년 하반기 | 179 | 82 | 45.80 |
2024년(2월 7일까지) | 9,733 | 5,221 | 53.60(개별상품 최고 손실률 58.2%) |
◇ 정부 ‘ELS 책임 분담 기준안’ 임박…금융사 ‘자율 배상안’도 압박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5일 “설 연휴 전 검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유형화, 체계화하고 이후 이달 마지막 주까지 회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점검하거나 추가 검사에서 문제점을 발굴해 책임 분담 기준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소송 등을 통해 법적 책임이 가려진 상태가 아닌 만큼 ‘(책임·손실) 분담 기준안’이라고 신중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은행권은 결국 금융 당국이 사실상 ‘배상안’ 가이드라인(지침)을 이달 말 전후 제시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국은 지난해 말 이후 주요 금융사를 상대로 현장 검사를 통해 ESL 불완전 판매 여부 등을 살펴왔는데, 금감원 검사국뿐 아니라 분쟁조정국 관계자들이 은행 판매 직원, 실제 가입 고객을 상대로 두루 판매 과정에 대한 조사를 벌인 데 은행권은 주목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분쟁조정국 투입은 배상안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근거 자료, 사례 수집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이 원장은 “금융회사들이 검사 결과에 따라 일부를 자율적으로 배상할 수 있는 절차를 병행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본다”며 당국의 분담 기준안과 별개의 금융사 자율 배상안도 주문했다.
◇ ‘이 투자자에게 ELS 적합했나’가 관건…적합성 위반 판단 다를 수도
과거 DLF(파생결합펀드) 등 사모펀드 사태 당시 당국은 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불완전 판매 여부를 판단하고 배상 기준을 제시할 때 불완전 판매 유형을 크게 ▲ 적합성 원칙 위반 ▲ 설명의무 위반 ▲ 부당 권유로 분류한 바 있다.
각 피해 주장 사례가 세 가지 유형에 어느 정도 해당하는지 점수를 매겨 높을수록 많은 배상을 결정했다.
금융감독 용어 사전에 따르면 적합성 원칙은 금융사가 파악한 투자자 특성(투자목적·재산상태·투자경험 등)에 적합하게 투자를 권유할 의무 또는 부적합한 투자 권유 금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감독 규정은 금융사가 투자자의 거래목적, 금융상품 이해도, 재산 상황, 투자성 상품 취득·처분 경험, 연령 등을 기준으로 투자 적합성을 판단하도록 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 노후 대비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려는 은퇴자에게 ELS와 같은 고위험·고수익 파생금융상품이나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주식형 펀드 등을 금융사가 권유했다면 적합성 원칙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만약 ELS 판매 과정에서 금융사가 손실 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거나, “예금과 똑같다”며 가입을 유도했다면 설명의무 위반이나 부당 권유 유형의 불완전 판매다.
따라서 은행권은 이번에 당국이 조만간 내놓을 ELS 책임 분담 기준안이 ‘고령자 상대 적합성 원칙 위반 사례의 경우 손실의 몇 % 금융사 분담(배상)’, ‘최초 ELS 상품 가입자에 대한 적합성·설명의무 위반 사례의 경우 손실의 몇 % 금융사 분담’ 등의 형태로 제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은행권이 당국 기준안 전후로 내놓을 ‘자율 배상안’과 향후 배상 과정에서 ELS 판매 과정상 적합성 위반을 당국이나 투자자들의 기대만큼 많이 인정할지는 불확실하다.
은행 입장에서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표준영업행위 준칙 등을 적용해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가입상품 위험등급을 고지했고, 매뉴얼에 따라 소득·연령대·직업·가입 경험·손실 감내 수준 등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져 취합된 점수에 따라 공격적 투자 성향으로 분류된 투자자만을 가입시킨 만큼 대부분 ‘적합성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결국 앞으로 적합성 원칙 위반 여부를 놓고 “투자자의 성향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본인 서명과 녹취 등의 증빙도 있다”는 은행과 “투자성향 확인 절차 등이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이뤄졌다”는 당국의 시각 차이에 따라 자율 배상안과 기준안의 각 배상 범위와 수준에도 적지 않은 격차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이 원장이 “판매사가 (ELS) 재가입을 명분으로 적합성 원칙을 지키지 않고 그냥 ‘믿고 가입하세요’라며 스리슬쩍 권유했다면 금소법상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논란을 미리 염두에 둔 ‘경고’로 해석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국이 아직 기준안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은행이 자율 배상안을 먼저 내놓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며 “순서상 기준안을 최대한 참고해서 자율 배상안이 완성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도 ELS 판매 과정이 100%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적합성 원칙 위반 여부의 경우 여러 다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적합성 원칙 위반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면, 외국인 등 주주들이 반발하거나 배임을 주장할 수 있는 만큼 법무법인 등과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shk999@yna.co.kr, hanjh@yna.co.kr, ss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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