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블록미디어는 디지털 대전환을 주창하고 있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하버드 통신’ 칼럼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박 전 장관은 미국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에서 반도체 산업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영선 전 장관이 미국 현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디지털 대전환’의 생생한 현장과 한국의 과제를 블록미디어 독자 여러분들께 직접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블록미디어=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카이스트(KAIST) 졸업식에서 발생한 ‘입틀막’ 사태가 일파만파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정부가 경직됐기 때문이다. 지시에 따르는 경직된 정부가 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직되면 공무원들은 한쪽만 바라보고 유연성을 잃어버리며 건의는 잘 수용되지 않는다. 물론 돌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경호 차원에서 과잉 대응이 가져온 것이라는 점까지 고려해도 정부의 경직성이 낳은 군사정권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나 볼 수 있는 창피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카이스트 졸업식 ‘입틀막’ 사태가 “반도체 주권 국가의 길”과 무슨 관련이 있나? 라고, 반문 할지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 이 사태를 야기한 R&D 문제를 보자. 정부는 과학계에 카르텔이 있다며 R&D 예산을 눈 감고 칼 휘두르는 것처럼 것처럼 잘라버렸다. 물론 카르텔이 존재한다. 나의 장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과학계도 정치화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R&D 예산의 올바른 사용 문제는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나누어주는 제도의 문제가 그 골을 더 깊게 해 왔다고 본다.
미국이나 독일 등의 R&D 예산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공무원 즉 정부의 편향과 카르텔이 더 문제다.
크게 3단계로 구분되는 미국의 경우 1단계 기초 R&D는 신청한 사람의 거의 대부분에게 주어진다고 보면 된다. 정부 공무원의 간섭도 한국처럼 시시콜콜하지 않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R&D를 받기 위한 카르텔이 형성될 수 없다. 한국은 R&D를 받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으로 카르텔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기부 장관 시절 독일경제장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독일은 어떻게 중소기업 강국이 되었는가? 그 비결이 무엇인가?”
독일 장관의 대답은 너무나 간명하고, 뜻밖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다. R&D 자금을 줄 때 1단계에서는 정부 심사를 최소화하고 목적에 맞으면 줬다. 그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1단계 기초 R&D의 경우 정부에서 까다롭게 심사해서 자금을 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성공 사례를 통계 내어 보니 결과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인내와 기다림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중소기업의 성장 동력을 우리는 포용과 다양성 결여로 잃고 있다.
물론 미국이나 독일도 큰 예산이 주어지는 3단계 R&D 자금은 심사가 까다롭다. 1단계는 씨앗에 물을 주듯 R&D 예산을 뿌리고 2단계, 3단계 올라갈수록 절차와 심사는 통과가 힘들다. 연구원이나 기업들은 2, 3 단계를 통과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1단계 연구 자금을 사용한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R&D 지급 방법을 반드시 개선해야 하고 그것이 카르텔을 방지하는 우선의 길이다. 여기엔 국회에서의 R&D 자금에 대한 정부 감사 문제도 포함된다.
둘째 ‘입틀막’ 사태와 같은 경직성을 유연하게 바꾸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정부는 물론 한국 기업 대부분의 리더십에 적용되는 문제다. 책 ‘반도체 주권 국가’에서 밝혔듯이(p253. 한국기업에 꼭 필요한 것- 유연한 기업문화에 대한 갈증 그리고 다양성 수용) 의사결정 구조를 마치 ‘지존처럼’ 한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지시’에 의한 상명하달식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소프트웨어 경쟁 시대에 창의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결국 밀려나게 된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조직의 경직성과 유연성의 차이가 더욱 극명하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 공장을 동북아에 넘겨주고도 반도체 주권 국가로서의 힘을 쥐고 있는 이유다.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결국은 미국이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직성은 지속해서 사고를 유발한다. 공무원 혹은 기업의 직원들이 유난히 사고를 많이 낸다면 조직문화 점검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조직이 경직되면 공무원 혹은 직원들의 자발성이 떨어져 안 일어날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사고 수습보다는 윗분 보고가 우선시 되고 지시가 내려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가 대표적이다. 조직의 경직은 근육마비를 불러오게 된다.
멀리 이곳에서 바라보는 요즘 한국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다. “유연한 조직문화, 다양성의 수용” 이것이 반도체 주권 국가의 길이요 대한민국 미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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