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신호경 한지훈 오지은 기자]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에 중동 사태까지 겹쳐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전환(피벗) 예상 시점이 갈수록 늦춰지고 있다.
더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마저 피벗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러야 4분기에나 인하를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점차 늘고 있다. 유가 등 물가 동향에 따라서는 아예 연내 인하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 이창용 한은 총재 “하반기 물가 2.3% 웃돌면 인하 어려울 수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이창용 한은 총재는 17일 미국 CNBC 방송과 인터뷰에서 “우리 금융통화위원회는 금리 인하 신호를 아직 보내지 않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 총재는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근원물가 상승률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근원물가는 예상대로 둔화하고 있지만, 소비자물가는 상당히 끈적끈적(Sticky)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 총재는 지난 12일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통화정책방향 회의 직후에도 “우리(한은)가 예상한 하반기 월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3%인데, 유가 등이 안정돼 경로가 유지되면 하반기 금리 인하 가능성이 있지만 이 경로보다 높아지면 하반기 인하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근원물가(에너지·식품 제외) 상승률은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전체 소비자물가(헤드라인) 상승률의 경우 공급 측면에서 농산물 가격과 유가 등이 들썩이면서 2%대에 안착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앞서 1월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이 총재가 사견임을 전제로 “6개월 내 인하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할 때만 해도 시장에서는 ‘상반기는 힘들겠지만, 연준이 6월께 인하를 시작하면 7월 등 3분기에 한은도 따라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 총재 발언 이후 7월 인하설은 시장에서 거의 사라졌고, ‘4분기 이후’ 관측이 유력해졌다.
◇ 중동사태, 인플레이션에 ‘기름’…유가·환율 오르면 수입물가↑
더구나 지난 금통위 이후 이스라엘·이란 무력 충돌이 현실이 되면서, 3분기 등 조기 인하 기대는 더 힘을 잃고 있다.
우선 현재 배럴당 90달러대인 국제 유가가 중동 사태로 100달러를 넘어설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이 총재가 얘기한 금리 인하의 기준인 ‘하반기 월 평균 2.3%’를 웃돌 가능성이 커진다.
심지어 현재 일부 해외 기관들 사이에서는 중동 사태가 국제 원유 주요 운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이어지면 유가가 120∼130달러대까지 뛸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한은의 올해 성장률(2.1%)이나 소비자물가상승률(2.6%) 전망치는 모두 80달러대의 유가를 가정해 도출된 것인 만큼, 유가가 80달러대 근처로 다시 빠르게 복귀하지 않는 한 한은과 정부는 올해 물가 전망치를 올리고 경제 성장 눈높이는 대폭 낮춰야 하는 처지다. 동시에 그만큼 금리 인하 시점은 뒤로 늦춰질 수밖에 없다.
중동사태 장기화는 유가뿐 아니라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고, 결국 이 경로를 통해서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원/달러 환율 상승) 같은 수입 제품의 원화 환산 가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총재도 지난 12일 환율에 대해 “기본적으로 예전처럼 환율 변동으로 경제 위기가 오는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한은)는 환율 상승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란의 이스라엘 본토 공격 이후 달러 등 안전자산에 대한 쏠림이 심해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16일 장중 17개월 만에 1.400원을 넘어선 바 있다.
다만 향후 환율 상승 폭과 안정 여부에는 외환 당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지,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자산 헤지(위험회피)를 위한 선물환 매도 물량이 얼마나 많을지 등의 변수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 미국도 신중 모드…파월 “물가 2% 확신까지 더 오래 걸릴 것”
미국 연준의 금리 인하 예상 시점이 갈수록 늦춰지는 점도 한은 금리 인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16일(현지시간) “물가 상승률이 2%로 낮아진다는 더 큰 확신에 이르기까지 기존 기대보다 더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다”고 밝혔다.
연준이 이처럼 금리 인하에 신중한 것은 지표상 여전히 경기가 좋아 물가가 뚜렷하게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10일(현지 시각) 공개된 미국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전년동월비)이 3.5%로 시장 전망치를 웃돈 이후,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선물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6월 금리 인하 확률은 20% 밑으로 떨어졌다.
주요 투자은행(IB)들의 연준 금리 인하 예상 시점도 계속 늦춰지는 추세로, 이달 들어 웰스파고와 TD는 당초 5월에서 6월로, JP모건과 노무라는 6월에서 7월로 한 달씩 미뤘다.
연준의 연내 기준금리 인하 횟수 역시 웰스파고가 5회에서 4회로, 골드만삭스는 4회에서 3회로, 노무라도 3회에서 2회로 각각 줄였다.
◇ 전문가 “한은 일러야 10월 인하…물가 안잡히면 내년으로”
국내 전문가들의 연준과 한은 금리 인하 시점이나 폭에 대한 눈높이도 점차 낮아지는 분위기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미국은 9월, 우리는 11월 정도에나 금리를 낮출 것”이라며 “지금까지 휘발유 가격이 그나마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억제했는데, 이제 유가가 오르면 물가는 더 안 떨어지고 금리 인하 시점도 늦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금리 결정에 있어 지금 한국은 미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만에 하나 유가가 100달러를 넘으면 한은은 올해 인하하지 못 할 수도 있다”며 “고 덧붙였다.
안재균 신한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원래 7월이었던 한은 인하 예상 시점을 10월로 옮기고, 연내 2번 정도로 봤던 인하 횟수도 1번으로 줄였다”며 “유가가 오르는데, 성장은 IT(정보기술) 중심으로 회복 중이니까 인하를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도 “시장이 예상하는 미국 금리 인하 시점이 3월, 5월을 거쳐 계속 늦춰지더니 이제 6월 설도 약해지고 있다”며 “연준도 한은과 마찬가지로 물가를 계속 우려하는 데다 미국 경제 상황이 좋은 만큼 7월에나 첫 번째 인하를 시작해 연말까지 0.25%포인트(p)씩 두 차례 정도만 낮추고, 한은은 4분기에 한 차례만 인하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시 “유가까지 문제가 되는 만큼 미국의 상반기 인하가 어려울 수 있다”며 “미국이 하반기 내리면 한은도 내수 등 경기 회복과 대출 부실 등을 고려해 0.25%p씩 두 번 정도 인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시장에서 미국 연준의 9월 금리 인하 컨센서스(평균적 기대)가 형성됐지만, 늦춰질 개연성도 있다”며 “미국 소비가 호조인데 중동 사태로 공급도 불안해지면 물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보다 먼저 금리를 낮추기는 힘들다”며 “한은이 미국을 보고 10월, 11월 인하할 수 있지만 내년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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