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푸른 하늘빛과 상큼한 풀잎·라임 향의 조화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처럼 맛과 향이 복잡하지 않아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 레드와 달리 안주를 까다롭게 가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은 함정이 있다. 독과점이 심하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의 50% 정도는 샤도네이(프랑스어로는 샤르도네)라는 말이 있다. 샤도네이는 추워도 더워도 각각의 고유한 맛을 낸다. 추우면 산도가 더우면 과일풍미가 진해지는 덕분이다. 거기에 와이너리의 양조철학을 입히기에도 아주 좋은 품종이어서 거의 대부분 와이너리에는 샤도네이 라인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와인숍에서 무심코 집은 화이트 와인은 샤도네이일 가능성이 50%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진격의 샤도네이’인 셈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하늘을 자랑하는 6월에는 천하의 샤도네이도 주춤하는 시기다. 기온은 30도에 육박하지만 장마 시작 전이라 습도가 적당한 한반도 6월의 날씨는 신의 축복처럼 눈부시다. 이탈리아가 부럽지 않은 반짝거리는 요맘때의 햇살에 나뭇잎이 바람에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것을 보면, 산사에서 풍경소리를 듣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런 날씨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테이블보를 깔아놓는-평소라면 닭살돋는다며 손을 내저었을-짓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6월 하늘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은 뉴질랜드 쇼비뇽 블링이다. 쇼비뇽 블랑의 원산지는 프랑스이지만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이 6월 하늘과 더 맞다. 뉴질랜드의 쇼비뇽 블랑의 상큼함은 다른 나라 포도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재능이다. 발랄한 풀 향기, 나무 향에 상큼한 시트러스향까지 버무려있는 쇼비뇽 블랑은 여름 와인의 절대 강자다. 거기다 가격도 착하다. 비싸면 비싼 대로 싸면 싼 대로 다 맛나다. 차갑게 먹으면 사실 와인의 중층적 먓과 향의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여름에는 가격차이가 의미가 없다.
실제 많은 와인 구매자의 가이드 라인 역할을 하는 비비노 누리집에 가보면 뉴질랜드 쇼비뇽 블링은 대부분 평점이 4.0을 넘는다. 매년 4.5를 받는 와인들도 있다. 고가의 샴페인이나 레드 와인의 최고봉(가격면에서)인 프랑스 부르고뉴 레드 와인들보다 더 평점이 높은 황당한 경우도 많다. 물론 비비노의 평점 알고리즘이 구매가 많은 값싼 와인들이 평점이 좋은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이 가진 잠재력이 없었다면 이런 점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선호하는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개성이 강한 와인이다. 각진 향과 맛을 좋아한다. 그래서 기온의 차가 큰 뉴질랜드 남섬 말버로우에서 나온 쇼비뇽 블랑을 즐긴다. 오이스터 베이나 누알라 쇼비뇽 블랑을 특히 좋아한다. 또 러시안잭과 머드하우스는 가성비가 좋아 세일을 하면 쟁여놓는다.
심지어 나는 한여름뿐 아니라 한겨울에도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을 즐긴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추운 날,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을 마시면 냉면 육수를 들이킬 떄와 또다른 울림이 느껴진다. 뉴질랜드 포도는 우리의 한 겨울인 1월에 영근다. 한잔의 와인은 그걸 북반구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에게 일깨워준다. 가장 추울 때 느끼는 뜨거움. 겨울철 마시는 맑고 찬 남반구의 화이트 와인은 남국의 밤하늘에 떠있는 남십자성을 보는 듯한 생경함을 안긴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여름에는 물론이고 한 겨울에도 단돈 2만원으로 그런 새로운 인지적 기쁨을 선사한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