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파시오네 로쏘, 코르비나·메를로 블렌딩해
2만원대지만 프랑스·미국 고급 와인에도 안 밀려
자국 품종만 고집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맛과 향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나는 한달에 2~3번 와인 강연을 한다. 와인 강연에서는 보통 5~10여병의 와인이 등장한다. 강연이 끝나면 나는 곧바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그날 마신 와인 중에 가장 맛있었던 와인을 뽑는 투표를 한다. 재미로 하는 투표다. 그런데 투표를 하면 언제나 이변이 펼쳐진다.
특히 레드 와인은 마치 월드컵 축구처럼 늘 이변이 일어난다(화이트는 거의 샴페인이나 부르고뉴 화이트가 1등을 한다). 전통의 강호인 브라질이 매번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게 프랑스의 비싼 와인이 늘 1등을 하는 게 아니다. 또 축구 종주국인 잉글랜드가 번번이 본선에도 못 올라가고 조별 예선에 탈락하듯이 빈티지가 오래 됐다고 몰표를 받는 것도 아니다. 또 재미있는 점은 배달한 피자나 양고기가 강연장에 배달돼 오는 그 시점에 딴 와인이 1등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비싼 와인도 잘 맞는 음식과 함께 마시는 와인을-그 와인이 지극히 평범하더라도-당할 수가 없다. 경쟁에서 승자는 실력보다는 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매번 이변을 몰고 다니는 와인이 있다. 국적은 이탈리아. 가격은 2만~3만원대다. 품종은 코르비나와 메를로의 블렌딩이다. 가격은 낮지만 이 와인은 시음 후 평가를 해보면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비싼 프랑스나 미국의 레드 와인에도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토스카나 BDM(부르넬로 디 몬탈치노)이나 피에몬테의 네비올로나 나폴리의 알리아니코도 손쉽게 따돌린다.
맨처음에 그랑 파시오네를 마셨을 때 15만~20만원 가량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명문 와이너리인 비비그라츠의 산지오베제와 함께 마셨다(산지오베제는 제우스의 피라는 뜻인데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주력 포도 품종이다. 브루넬로 같은 클론 품종까지 합치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품종이다).
물론 비비 그라츠 산지오베제 와인의 빈티지가 어렸고 코르크를 따고 공기와 접촉하는 시간이 적었다고 하지만 그랑 파시오네가 훨씬 맛이 있었다. 나는 그랑 파시오네가 고가의 비비그라츠 와인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아서 꽤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격은 비비그라츠의 10분의 1쯤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2만원도 하지 않았다. 1만원대였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 그랑 파시오네를 와인 강연에 조커처럼 가지고 다녔다. 반응은 꽤 괜찮았다. 많은 수강생들이 선호도 투표에서 이 와인을 선택했다. 내 의도대로 그랑 파시오네는 병당 가격이 10만원이 넘는 많은 고급 와인들을 저격했다.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미국 와인 등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여러 번 전체 선호도 1위에도 올랐다. 계급장 떼고 붙는다면 그랑 파시오네는 거의 무적의 와인처럼 보였다.
그랑 파시오네는 베네치아가 주도로 있는 베네토 와인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포도 품종이 있다. 코르비나라는 품종인데 색깔이 까마귀처럼 검어 까마귀라는 베네토 방언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코르비나는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아마로네라는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이다. 아마로네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진하고 약간의 단맛이 있는 와인이다. 아마로네는 코르비나 등 포도 알갱이를 밀짚이나 대나무 위에 말려 당도를 끌어올려서 만든다. 높은 당도는 와인을 상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코르비나로 만든 와인은 보관 및 유통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근데 이전에는 가장 비싼 와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 지역 양조가들은 근대 들어서 양조기술의 발달로 발효를 어느 순간 멈춰 드라이하게 마시는 와인으로 변신시켰다. 그래서 만들어진 와인이 바로 아마로네다. 아마로네는 ‘쓰다’라는 뜻이다. 달아야 하는 디저트 와인의 발효를 멈추게 했더니 상대적으로 쓰게 느껴졌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붙었다. 실제 아마로네는 쓰지 않다. 부드럽고 당도가 느껴지는 훌륭한 와인이다. 바디감도 탄탄해 아마로네는 양고기나 스테이크는 물론 한식의 불고기나 갈비구이 등과도 잘 어울린다.
설명했듯이 아마로네의 전통적인 제작과정은 손이 많이 간다. 손이 많이 가면 맛있지만 비싼 것은 당연하다. 보통 10만~20만원 정도다. 그런데 양조업자들은 여러 실험을 하다가 이렇게 수고로운 일을 하지 않고도 아마로네의 진한 맛과 비슷한 맛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바로 늦게 수확해 당도가 오른 코르비나에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프랑스 품종인 메를로를 첨가한 것이다. 그랑 파시오네는 코르비나는 40% 가량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 메를로다. 이탈리아 와인 전통에 보면, 주객이 전도된 와인이다.
메를로는 부드러운 탄닌과 산도 그리고 베리향이 특징이다. 타닌이 많지 않아서 코르크를 따면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포도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높은 당도의 코르비나와 부드러운 메를로가 결합한 이 와인은 부드럽고 진하고 향긋하다. 그런데도 신대륙의 느끼함이나 과정이 없이 깔끔한 유럽의 기품이 느껴진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 맛의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다.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 탓에 다른 나라 포도 품종을 쓰는 것을 경계해왔다. 1970년대까지 다른 나라 품종이 들어가면 정부가 원산지 보호 인증(DOC)를 아예 해주지 않았다. 프랑스 포도 품종을 블렌딩한 지역은 프랑스 왕가와 혈연관계를 맺었던 메디치가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지방 정도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양조학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1960년대부터 일부 와이너리가 전통 품종에 프랑스 품종을 섞은 와인들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잡종 취급을 받았지만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대호평을 받았다. 이탈리아 정부도 일부 와이너리의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차츰 이런 깐깐한 순혈주의의 벽이 무너져 내렸고 지금 이탈리아 와인의 트렌드가 됐다. 그랑 파시오네도 이런 이탈리아 와인의 트렌드 변화 덕에 시장에 나온 와인의 하나다. 이 와인 역시 베네토주의 지역인증(IGT)을 받았다.
그랑 파시오네를 접한 뒤에 나는 메를로를 블렌딩한 이탈리아 와인을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랑 파시오네 만큼 뛰어난 퍼포먼스의 와인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대체로 이탈리아 메를로 와인은 꽤 비싸다).
그랑 파시오네는 포도의 순수성을 따지던 근대 양조학 시대에 태어났다면 서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또 이 와인을 만드는 곳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와인을 유통하는 업체였다. 1970년대 이후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신생 와이너리다. 하지만 그랑 파시오네의 맛은 ‘이탈리아’ ‘비유명 와이너리’ ‘비전통적 품종’이 받을 만한 편견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와인이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