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와인, 여름 과일 복숭아와 환상궁합
복숭아의 핑크빛 향 섬세하게 이끌어
매콤한 한식은 물론 디저트와도 잘 어울려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복숭아 과즙의 달콤함과 상큼함은 여름철 뙤약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완벽하게 날려주기 때문이다.
같은 여름 과일인 수박과 멜론도 청량감으로 더위를 잊게 하지만 섬세함에서는 복숭아를 따라올 수는 없다. 복숭아는 나무에서 딴 뒤에도 계속 과체가 커지는 후숙 과일이어서 매장에서 사온 뒤에도 맛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재미도 있다.
나는 딱딱한 복숭아(이하 딱딱이)보다 물렁한 복숭아(이하 물렁이)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천도나 황도보다는 백도를 좋아했다. 백도는 8월이 제철이다.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 복숭아는 향긋하게 영근다. 하지만 백도는 절정이 짧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면 백도가 사라진다. 맛있는 백도를 먹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2년 혹은 3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타이밍의 미학이 있는 과일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복숭아의 맛이 없었다. 장마전이나 장마 후에나 모두 맛이 없었다. 개화시기 이상저온이 왔고 거의 한달 가까이 장맛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복숭아뿐 아니라 수박도 멜론도 예년과는 달랐다. 여름 과일을 즐기는 나에게는 최악의 해였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철 이상 기온은 연례행사가 되고 있다.
올해는 다행히도 복숭아의 맛이 훌륭하다. 장마 전인데도 백도도 황도도 모두 맛이 꽉 찼다. 6월 말까지 날씨가 좋았고 기온도 적당해서 생육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작년의 복숭아 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최근 복숭아 명인의 복숭아를 집에서 편안하게 받아볼 수 있는 이커머스 사이트를 알게 돼 나의 복숭아 여름이 더욱 농염해지고 있다.
8월이 제철이지만 7월 중순까지 먹은 복숭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황도인 ‘우황’과 백도인 ‘몽시쥬크’였다. 우황은 황도인데 과즙이 백도처럼 많고 당도가 좋았다. 또 육질이 딱딱한 편이었다. 복숭아인데 특이하게 바닐라향이 났다. 몽시쥬크는 백도인데 물렁한 게 아니라 반쯤 말랑했다. 당도가 높고 과즙이 정말 풍성했다. 이제 복숭아에서 말랑이 딱딱이 구분이 필요없게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복숭아의 농밀함과 바닐라향은 화이트나 로제 와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때 마침 한식인 파전과 함께 로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로제 와인은 원래 해산물을 즐겨 먹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시작됐다. 화이트 와인에 껍질이나 과즙을 함께 넣어 발효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독특한 핑크빛 향과 맛을 갖게 된다. 이 독특한 풍미 덕에 고추장이나 간장을 베이스로한 스파이시한 한식에 잘 맞는다. 나는 지금까지 로제 와인을 주로 회, 만두, 파전 등 한식과 즐겨 먹었다.
특히 로제 스파클링은 쌈장과 간장이라는 강력한 향과 맛의 소스를 쓰는 한식과도 너무 잘 어울렸다. 지금까지 로제 스파클링과 함께 먹어서 실패한 음식은 홍어회와 홍어전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로제 와인과 과일을 함께 먹을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다.
화이트 와인은 복숭아 맛이 특징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과일과 잘 어울린다고 대부분의 와인 책에 써있다. ‘과연 그럴까’ 늘 궁금했는데 이날 마셔보니 정말이었다. 맛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신들이 먹었다는 그리스 신화의 넥타르가 이런 맛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인 카라바죠(1571~1610)의 작품 ‘박쿠스’(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를 보면, 와인과 함께 과일을 마시는 박쿠스가 등장한다. 그 그림에서 과일은 그저 박쿠스를 빛내주는 아름다운 정물쯤으로 생각했는데 진짜 로제 와인의 안주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다.
올 여름에는 복숭아를 더 자주 먹을 것 같다.
같이 보면 좋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