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 누아 명가 앙드레 클루에 초키의 쨍쨍함과
구운 빵껍질 향의 랑그르 치즈 조합…긴 여운
셰프 갈라쇼서 맛본 샹파뉴의 명징한 페어링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내가 죽기 전에 마실 와인을 고르라고 하면 별 고민없이 샴페인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와인은 빈티지도 따져야 하고 맛이 올라오기까지 코르크를 따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보면 와인을 못 마시고 죽거나 열리지 않은 시큼한 와인을 최후의 와인으로 마셔야 한다. 그런데 샴페인은 온도만 맞으면 딸 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맛나다. 마시는 순간부터 마지막 잔까지 축제인 셈이다.
그런데 샴페인에는 함정이 있다. 2가지다. 하나는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다. 샴페인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감안하면 10만원 언저리인 가격대는 좀 고민이 된다. 두번째는 산도가 강해서 안주 없이 두 잔을 먹기 어렵다. 안주도 다른 스파클링 와인과 다르게 제법 무게가 있어야 한다. 캐비어나 연어나 튀김 등의 제법 무게 있는 안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샴페인은 대부분 안주 없이 마시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샴페인의 산도와 향을 무시한 음용 방법이다. 또 많은 사람이 과자 조각이나 치즈 정도랑 샴페인을 먹는데 이 역시 샴페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페어링이다.
며칠 전에 내가 좋아하는 20대 셰프의 갈라쇼에 갔다. 이 셰프는 특히 나에게는 각별했다. 20대인데 국내 교육에서 받을 수 있는 소믈리에 자격 가운데 가장 높은 WSA 3급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을 갖고 있는데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로 불리는 블루 리본 서베이에 등재된 레스토랑을 운영해 왔다. 그만큼 열심이고 적극적인 청년 셰프다. 거기다 그는 음식에 대한 조예도 남달라서 그의 레스토랑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 부천에 있는데도 참 자주도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내게 삼배체 굴의 맛을 알려준 귀인이었다. 삼배체 굴은 유전자 배양을 통해 굴이 알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 일반굴과 달리 여름에도 먹을 수 있다. 굴을 사랑하는 나에게 계절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삼배체 굴은 “유레카”라는 감탄이 나올 만한 발견이었다. 지난해 연말에는 몇만원의 입장료만 내고 이 굴과 샴페인을 무제한으로 즐기기도 했다. 레몬과 타바스코 그리고 생햄과 올리브를 뿌려 삼배체 굴과 샴페인을 원없이 먹었던 유쾌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 셰프의 갈라쇼 메뉴는 당연히 기대됐다. 많은 메뉴가 나왔지만 나는 첫번째 아페타이저로 나온 것은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의 치즈인 랑그르(Langres)를 빵에 올린 브루스케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밝은 오렌지색 껍질을 지닌 랑그르 치즈는 소금으로 치즈 외피를 세척하고 닦아낸 연성치즈다. 살균을 위해 겉껍질만 소금으로 닦아낸다. 샹파뉴 아르덴 지역의 랑그르 고원에서 생산돼 랑그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랑그르 치즈는 약간의 시큼한 치즈향이 나는데 먹어보면 갓 구운 식빵의 향이 난다. 이는 샴페인이 갖는 향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이 치즈에 샴페인을 부어서 살짝 녹여 먹기도 한다.
함께 마신 샴페인은 앙드레 클루에 초키(Andre Clouet Chalky)였다. 이 와인은 블랑 드 블랑인데 샤르도네 100%로 만든다. 앙드레 클루에는 18세기부터 샴페인을 생산해온 샴페인의 명가다. 특히 이 와이너리는 피노 누아를 사용한 블랑 드 누아 샴페인이 유명하다. 이 와이너리에서 갖고 있는 와인밭에서 나오는 피노누아는 100% 그랑 퀴리다. 그래서 보통 피노 누아가 50% 가량 들어있는 다른 블랑 드 누아 샴페인과 달리 100% 피노 누아를 쓰는 샴페인을 생산한다. 원래 피노 누아가 100%인 샴페인은 바디감이 남다르다. 나는 여리여리한 블랑 드 블랑보다는 피노 누아가 많이 들어간 블랑 드 누아를 좋아한다.
하지만 블랑 드 누아가 특기인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블랑 드 블랑이라니. 검은 쌀의 명가에서 생산한 흰쌀처럼 그 맛과 향이 특별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름도 초키였다. 초키라는 건 샹파뉴 지방의 특징인 석회질이 풍부해서 미네랄감이 강하다는 의미다. 나는 샴페인 가운데 석회암 지대에서 나온 미네랄이 강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초키에 큰 기대를 했다.
마셔보니 쨍하는 날카로움이 비강을 채웠다. 목으로 넘겨보니 조약돌 맛과 약간의 짠맛이 느껴졌다. 보통의 하늘하늘한 블랑 드 블랑과 구별이 됐다. 날카로우면서 힘찼다. 샹파뉴는 원시시대 때에는 바다였다. 그래서 조개껍질과 조류가 퇴적돼 만들어진 석회암이 풍부하다. 샹파뉴의 일부 지역에는 아예 석회암이 땅위로 드러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땅에서 자라는 포도는 미네랄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초키를 한모금 마시고 부르스케타를 베어 무니 샴페인의 날카로운 산도를 싹 씻어준다. 랑그르 치즈가 가진 연성치즈의 쿰쿰한 향과 높은 산도가 잘 어울린다. 랑그르 치즈는 우유로 만드는데 연성치즈가 갖는 특유의 꼬릿함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우유로 만드는 연성치즈의 순한 맛과는 큰 차이다. 꼬릿한 향과 날카로운 산도의 대비는 치즈 위에 올린 스페인의 모과잼인 멤브릴로(Membrillo·스페인어로 모과란 뜻)의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이 마무리해주었다.
샴페인은 샤르도네가 기후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인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이다. 또 화이트 와인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을 받기 위해 오랫동안 상업적으로도 고심해왔다. 상업화라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스파클링 와인의 발전에 큰 공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랑그르 치즈 역시 우유로 만든 연성치즈 가운데 독특함이 남달랐다.
이날 갈라쇼는 내가 좋아하는 셰프가 파인 레스토랑 운영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방식의 팝업 레스토랑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파인 다이닝은 엄선된 재료와 수공업적인 조리 방식 탓에 영업이익률이 낮아 경영이 쉽지 않다. 파인 다이닝이 활성화된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그래서 코로나19이후 스타 셰프들이 팝업 레스토랑을 많이 열고 있다.
샴페인과 치즈를 좋아하는 나에게 샴페인 앙드레 클루에의 초키와 샹파뉴이 치즈인 랑그르 치즈의 조합은 강대 강으로 읽혔다. 여기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파인 다이닝의 셰프의 깐깐함까지 합치면 완벽한 3강 구도였다. 하지만 고릿한 랑그르 치즈를 올린 브루스케타와 날카로운 초키 샴페인의 조화는 기분좋은 명징함을 남겼다. 파인 다이닝 셰프의 기개 넘치는 선택이었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도 많고 젊지만 가르침을 주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입도 머리도 맑아지는 갈라쇼였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