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타 비텔로’, 예술적으로 승화된 이탈리아 육회
송아지 고기에 올리브유 등 최소한 양념으로 맛내
스파클링 와인인 프란치아코르타와 환상 매칭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피에몬테는 미식의 천국으로 통하는 이탈리아 20개 주에서도 시칠리아·에밀리아와 함께 미식의 고장으로 통한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피에몬테는 프랑스와 가까운 지리적 특징 때문에 요리가 매우 발달해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송아지 고기 육회다.
내가 지난 5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이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피에몬테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먹었던 것도 육회였다. 또 나와 함께 동행했던 와인 기행 멤버들이 가장 칭찬을 아까지 않았던 음식도 이탈리아식 육회였다.
이탈리아에서 육회는 ‘바투타’라고 부른다. 바투타란 ‘두들김’ 혹은 ‘박자’라는 뜻의 단어다. 동사 바투레(batture: 때리다, 두드리다)에서 온 단어다. 여기에 송아지를 뜻하는 비텔로가 붙어서 송아지 육회라는 뜻으로 바투타 디 비텔로로 불린다. ‘두드린다’는 의미는 칼날로 섬세하게 송아지 고기를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의미다. 송아지 고기는 지방이 적어 담백하다. 이런 담백하고 부드러운 살을 칼을 이용해 더 먹기 좋게 가다듬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요리는 타르타르 스테이크로 불리던 러시아 요리였다. 몽골인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 요리는 러시아 짜르가 즐겨먹을 정도의 고급요리로 발달했다. 이를 프랑스 요리사들이 수입해서 좀더 섬세하게 변형시켰다. 이후 프랑스의 공국인 사보이아에서 출발해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피에몬테에서 육회는 좀더 자연친화적으로 변신했다. 피에몬테의 바투타는 송아지 고기와 허브 그리고 올리브 오일을 쓰는 게 레시피의 전부다.
이번 여행에서 이 요리를 처음 먹었던 곳은 아스티의 노천 카페였다. 아스티 시내에서 구글 평점이 가장 좋은 곳이었는데 요리는 그렇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식당에서 나는 늘 습관처럼 바투타 디 비텔로와 멸치절임인 인살라타 알리치를 주문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전채 요리다.
나는 멸치절임이 훨씬 맛있었는데 사람들은 육회가 더 맛있다고 입을 모았다. 내가 보긴 가을 축제를 위해 골목마다 깃발을 내건 아스티 시의 분위기 탓에 맛을 느낀 것이지 이 집의 비텔로는 평균점 이하였다.
하지만 좀더 맛있는 육회를 먹을 기회를 금세 찾아왔다. 나도 깜짝 놀랄만큼 맛난 육회는 그날 밤 찾았던 바르바레스코의 미슐랭 플레이트 레스토랑인 ‘안티네(Antine)’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접시의 기교보다는 재료에서 오는 확실한 맛을 추구한다. 이는 한국 사람과 비슷한 측면이다. 맛에서는 무척이나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서양 요리와 달리 소스에 의존하지 않고 원재료를 강조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는 이탈리아가 아니면 쉽게 만들기 어렵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강렬하며 신선한 재료를 써야 비로소 그 맛이 난다. 반면 이런 재료가 없다면 소스로 요리를 휘감아야 한다. 신선한 물소 젖으로 만든 나폴리의 부팔라 모짜젤라와 하늘하늘하지만 진한 향의 제노바 바질로 만든 모짜렐라 샐러드를 어떻게 이탈리아가 아닌 곳에서 맛볼 수 있을까? 이런 식재료는 비행기에 실리는 순간부터 맛을 잃고 만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밖에서는 힘을 못 쓴다는 것은 이탈리아 요리의 약점이기도 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파스타 피자같은 초보적인 요리를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요리라고만 생각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이탈리아 요리는 심플하지만 복잡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의 육회는 꽤나 아름다웠다. 한송이 꽃과 같았다. 맛을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모양만 본다면 입맛을 북돋기 위해 먹는 전채가 아니라 디저트처럼 보였다. 육회 위에 올린 헤이즐넛 마요네즈의 균형잡힌 맛과 이름 모를 씁쓸한 뿌리의 허브도 조화로웠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음식과 마신 와인은 밀라노 인근 지역인 롬바르디아의 스파클링 와인인 바로네 피치니(Barone Picinni)의 프란치아코르타 리제르바였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밀라노 지역은 16세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해왔는데 샴페인 제조 방식과 똑같은 방식(개별 병입)으로 만들면서 나름의 명성을 유지해왔다. 바로네 피치니는 19세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본격 생산해온 유서깊은 와이너리다. 우리가 마신 바냐도레(Bagnadore) 리제르바는 빈티지 스파클링 와인으로 좋은 포도가 생산된 해에만 한정 생산된다. 단일 포도밭에서 생산된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를 블렌딩해 만들어 병입한 뒤 무려 60개월을 숙성한다. 그래서 리제르바가 붙었다
첫 모금은 강한 미네랄감과 산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차갑게 서빙이 되어 청량감은 조금 떨어져 아쉬웠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런 무게감이 육회의 입맛을 돋우었다. 환상적인 전채요리였다.
이후 이 레스토랑에는 6가지의 코스 요리가 나왔는데 양이 생각보다 많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배가 불렀다. 2시간이 넘는 만찬이었지만 6개의 요리를 먹기에는 시간이 꽤 부족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만찬이 9시가 넘어서도 이어지자 배부름과 도착한 첫날이어서 시차(이탈리아의 밤 9시는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4시였다) 탓에 졸음이 쏟아졌다.
맛난 음식을 놓고 집중력이 흔들렸다. 육회 이후 피에몬테 만두인 플린과 토리노식 소고기 커틀렛이 나왔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와인과 음식에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바투타 비텔로의 맛과 향기는 뚜렷이 기억한다. 그 음식이야말로 이번 피에몬테 와인 기행의 하이라이트의 서곡이었기 때문이다.
송아지 육회, 바롤로 바르베라와도 찰떡 궁합
이후 우리는 3번의 육회를 더 먹었다. 미슐랭 원스타와 바롤로의 유명 와이너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물론 지역 호텔의 직영 레스토랑에도 갔다. 모두 각자의 독특한 맛이 있었다. 그때그때마다 와인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파클링은 물론이고 레드와인인 바르베라, 바롤로와 육회를 먹었을 때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특히 육회를 칼로 두드리지 않고 살짝 포를 뜬 알바식 육회는 우리를 더욱 들뜨게 했다. 고기를 어떻게 써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이들이 도축한지 하루나 이틀내로 육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공포장 상태로 약간의 숙성을 해서 먹는다는 것도 우리 육회와는 다른 점이었다. 횟집에서 활어 회가 아니라 선어 회를 먹는 셈이었다. 하지만 차갑게 서빙됐기 때문에 숙성육과 신선육의 정확한 차이를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맛과 예술과 그리고 과학이 결합된 이탈리아 육회는 와인의 맛을 극대화할뿐 아니라 우리를 이탈리아 음식문화의 중심부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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