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 ‘필리포 갈리노’…아르네이즈 복원에 기여
300m 높은 고도지만 조개껍질 나오는 토양서 자라
미네랄감·향 좋아 해산물·햄 쓴 전채 요리에 적격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이탈리아 쿠네오] “이게 우리의 토양이다”
와이너라 필리포 갈리노(Filippo Gallino)의 홍보 담당 니콜로는 조개껍질이 든 유리병을 흔들었다. 나는 처음 와이너리 시음 식탁 위에 있는 유리병을 보고 휴가철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인줄 알았다. 필리포 갈리노가 자리한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 쿠네오현 로에로(Roero) 지역(행정구역은 카나레 코무네)은 고도가 조금 높은 300~350m에 이른다. 그런데 땅을 파면 조개껍데기가 나온다니 무슨 말일까?
이탈리아를 대표해 ‘왕의 와인’으로 불리는 바롤로를 생산하는 지역인 바롤로는 해발 250~300m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포도밭이 있다(알프스 아래인 트렌토 지역의 와이너리는 바롤로 보다 높은 지역도 있다). 하지만 바롤로의 바로 북쪽, 로에로의 고도는 바롤로보다 더 높은 것이다. 그래서 로에로에 가면 상당히 높은 느낌을 받는다. 이탈리아 포강 유역에는 높은 산지가 많지 않아 지평선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바롤로나 로에로도 3천만년 전에는 바다였다. 4억 5천만년전 바다였던 유럽대륙은 융기를 했지만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지역은 그때 융기를 하지 않고 대부분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3천만년전 이 지역이 서서히 융기를 하면서 지금과 같은 구릉지대가 됐다. 그래서 이 지역은 조개 껍질 뿐 아니라 고래 화석도 발굴된다.
로에로는 미네랄이 풍부한 점토와 모래가 토양를 이룬다. 이는 바롤로의 주 생산 지역인 라모라와 일치한다. 바롤로와 로에로는 바롤로의 젖줄로 불리는 타냐료(Tanaro) 강을 두고 붙어 있다. 하지만 북쪽의 로에로가 좀 더 높게 솟았고 강의 흐름이 알바 시의 바롤로와 바르베르스코 쪽으로 바뀌면서 로에로의 토양은 진흙이나 자갈보다는 모래가 더 주를 이룬다. 타냐로 강이 만약 바롤로쪽이 아니라 로에로로 흘렀다면 로에로는 왕의 와인을 만드는 타닌이 강한 네비올로가 자랐을지 모르겠다.
나는 피에몬테 와이너리를 4번 방문했지만 로에로에는 이번에 처음 가보았다. 지금까지 피에몬테에서 가장 유명한 바롤로, 바르바레스코를 주로 갔고 또 아스티(모스카토 재배지), 몬페라토(모스카토, 바르베라)는 들렀지만 로에로를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와이너리 투어에는 피에몬테의 화이트 와인도 일정에 포함돼 있다. 피에몬테 토착 품종인 아르네이즈(Arneis)와 코르테제를 보기로 한 것이다. 이 두 품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피에몬테의 고집스러운 양조가들이 복원에 성공한 화이트 와인 품종이다. 아르네이즈는 바롤로와 생산지가 비슷해 바롤로의 화이트로 불리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코르테제를 생산하는 가비(Gavi)는 피에몬테 에서도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어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결국 아르네이즈의 로아레는 이번 와이너리 투어의 유일한 화이트 와인 생산자인 셈이었다.
로에로는 피에몬테에서도 고지대로 통하는 라모라보다도 더 높았다. 해발 100m의 차이인데 두 지역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바롤로에서 출발해 필립포 갈리노 와이너리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을 때 받은 느낌은 강원도 산골 고냉지 배추 재배지에 온 것 같았다. 산은 중첩돼 있었고 중첩된 산들에는 포도나무가 빼곡했다. 산이 겹겹이 이어져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친숙한 풍경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마침 전날 비가 와서 흙이 젖어 있었는데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었다. 산도 흙도 기상이 남달라 보였다.
와이너리 마케팅 담당자인 니콜로는 시음 전에 리슬링을 따 분쇄한 포도를 담은 흰 플라스틱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9월 초가 리슬링을 빚는 때라고 했다. 피에몬테 북부에서는 생산되는 리슬링은 독일의 리슬링과 달리 날카롭고 힘차다. 그래서 해산물과 먹으면 쨍한 맛이 인상적이다. 가격은 10유로대로 합리적이다. 내가 아르네이스와 함께 좋아하는 피에몬테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와인이다. 통에서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발효되고 있는 리슬링 향기에 벌써 침이 고였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아르네이즈다. 와이너리를 이끌고 있는 여주인 라우라는 아버지 필립포와 어머니 마리아가 1972년 출시한 아르네이즈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와이너리 홍보 책자의 첫페이지는 할아버지인 스테파노와 아버지 필립포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의 사진으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부심이었다.
와이너리의 소개가 끝나자 라우라와 니콜로가 가져온 아르네이즈는 모두 2종류였다(레드 와인인 바르베라도 한병 가져왔다). 가장 심플한 아르네이즈DOCG와 이를 12개월 강철탱크에서 숙성한 아르네이스 리제르바였다. 궁금했다. 숙성한 아르네이즈의 맛이.
숙성하지 않은 아르네이즈 DOCG의 가장 큰 특징은 시트러스 향과 함께 풍부한 미네랄감이었다. 그래서 산뜻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중성적인 느낌도 났다. 쇼비뇽 블랑과 샤르도네의 중간 정도의 맛과 향 탓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동북부에서 많이 마시는 피노 그리지오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바디감과 미네랄이 훨씬 강했다. 아르네이즈에는 여러 가지 맛의 중첩이 느껴졌다.
이 아르네이즈를 12개월을 강철탱크에 숙성해 출시한 리제르바는 일단 색깔부터가 숙성한 샤르도네처럼보였다. 숙성하지 않은 아르네이즈 DOCG가 볏짚색이라면 리제르바는 훨씬 짙은 노란색이었다. 맛도 역시 무게감이 남달랐다. 꽃향기와 숙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열대과일 향기가 났다. 이 정도면 닭요리나 돼지고기 햄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르네이즈는 피에몬테 방언으로 ‘작은 악당’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냐면 이 포도로 맛을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또 아르네이즈는 바롤로의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첨가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바롤로 포도인 네비올로를 보호하기 위해 네비올로 옆에 심는 보조역할을 했다. 강한 청포도의 향을 이용해 벌레와 새들의 관심을 네이올로에서 아르네이즈로 돌릴려고 했기 때문이다.
‘네비올로의 방패’쯤으로 쓰던 아르네이즈는 지금은 독특한 바디감과 향기로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호주와 미국에서도 아르네이즈를 재배한다. 그렇지만 아르네이즈는 화이트 와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산도를 뽑아내기 어렵다. 재배도 까다로워 지금도 수많은 포도 품종 가운데에서 재배 면적이 가장 적은 그래서 ‘가장 귀한 포도’로 꼽히고 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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