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미 조지아주=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침로를 결정할 대선을 16일 앞둔 20일(현지시간) 기자는 외신 기자단의 일원으로 남부 최대 경합주인 조지아주를 취재할 기회를 얻게 됐다.
조지아주 최대도시 애틀랜타로 향하면서 기자는 새삼스럽게 흑인 민권 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렸다.
킹 목사가 1963년 8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 평화대행진에서 한 ‘아이 해브 어 드림'(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이 생각나서다.
그 연설에서 킹 목사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을 이야기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양극화한 2024년의 대선 핵심 경합주 조지아와, 킹 목사가 꿈꾼 ‘그날’과는 얼마나 거리가 있을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기자는 이날 조지아주 코브카운티의 시니어 센터, 풀턴카운티의 교회 등에 설치된 사전투표소를 찾았다.
지난 15일 시작한 조지아 현장 사전투표는 전날 오후까지 14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주 당국은 밝혔다. 첫날의 경우 약 31만명이 사전투표에 참여해 2020년 대선(13만6천739명)은 물론 역대 첫날 사전투표 참가자 최다 기록을 갈아치웠을 정도다.일요일인 이날도 작렬하는 미국 남부의 가을 햇살처럼 사전투표 열기가 뜨거웠다.
각 투표소에는 부부, 형제·자매 등 가족 단위로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부모를 모시고 온 중년 부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의식’을 치르듯 첫 투표권을 행사한 10대 남성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왜 사전투표에 참여했느냐’는 질문에 한 60대 남성 유권자는 “과거 사전투표가 없을 때는 당일 투표를 위해 길게는 6시간 씩 줄을 서야 했다”며 시간을 절약해가며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사전투표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사전투표 현장에서 투표를 마친 유권자들을 만나 누구를 찍었는지 질문해보니 예상대로 인종(흑인과 백인)에 따라 대체로 단층선이 그어졌다.
사전투표소에서 만난 백인 유권자 중 트럼프 전 대통령에 투표했다고 말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장하는 2020년 대선 선거부정 의혹을 근거 있는 것으로 믿었고, 이번 대선 이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불법 이민자 문제와 인플레이션을 꼽았다.
트럼프를 찍었다고 밝힌 50대 백인 남성 로이 맥대니얼 씨는 “트럼프가 재임 중일 때 경제는 좋았고, 이민 문제도 그가 잘 대처했다”며 “그리고 그가 대통령일 때 세계는 덜 불안했다. 지금 중국과 이란이 하는 것을 보고,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라. 그것이 내가 트럼프를 찍은 이유”라고 말했다.
역시 트럼프에 투표했다고 밝힌 37세 백인 남성 조시 존슨 씨는 “나는 내 집 장만을 꿈꿨는데 (바이든 행정부 임기 중) 집값은 배로 뛰고 금리는 4배로 치솟으면서 살 수가 없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이집트인 친구가 있는데 그는 6년간 뼈 빠지게 일해서 미국 국적을 얻었고, 나는 그 과정과 그의 성실함을 존중한다”고 밝힌 뒤 “그런데 지금,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데 원칙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투표 과정에서 미국 시민권자임을 확인하지 않고 투표를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며 선거부정 문제 재발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반면 흑인 유권자 중 다수를 이룬 해리스 부통령 지지자들은 대체로 해리스 부통령이 약자를 잘 대변할 인물임을 강변했다.
흑인 여성 캔덜(50)씨는 “해리스의 가치관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과 ‘분리’를 중단하기 위해 (카멀라 해리스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날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밝힌 18세 흑인 남성 랜스 씨는 “나는 해리스 부통령이 흑인과 여성, 저소득층 등 대표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믿고 그녀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랜스 씨는 성별 불문하고 흑인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몰표를 줬던 4년 전과 달리 해리스 부통령이 흑인 남성의 지지를 2020년의 바이든 대통령만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대표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 대변하는 쪽은 주로 민주당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그 통념을 약간 흔들었다고 본다”면서도 “(흑인의) 다수는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전했다.
두 후보 지지자 사이에 접점은 도무지 찾기 어려웠다.
킹 목사가 꿈꾼 흑백 통합의 ‘식탁’은 차릴 수 있을지언정, 그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자리는 오래 이어지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누구를 찍었다고 밝히길 거부한 62세 백인 남성 톰슨 씨는 “불법 이민 문제를 개인적으로 매우 걱정한다”며 “사람들이 질서 없이 몰려 들어오는 것은 법치 측면에서 미국의 매력을 떨어뜨리게 된다”고 말했다.
톰슨 씨는 남은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대선 승부를 가를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투표율’을 꼽았고, 트럼프 측에서 주장하는 선거 사기 가능성에 대해 “우려는 되지만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고 진단했다.
신원과 나이, 지지 후보 등을 밝히길 거부한 한 중년 흑인 남성은 “이번 선거는 정말 중요한 선거로, 경제, 안보, 보건, 낙태권, 국경 등 모든 문제가 걸려 있다”며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투표를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인단 16명이 걸린 조지아주는 7대 경합주 가운데 펜실베이니아주와 더불어 대선 승부를 가를 가장 중요한 격전지로 꼽힌다.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19일부터 이날까지 이틀간 조지아주에서 유세 등 일정을 소화한 데 이어 오는 24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이곳에서 공동유세를 하기로 한 것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23일 이곳에서 대규모 유세를 할 예정인 것만 봐도 조지아주에 두 후보가 두고 있는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조지아주는 특히 흑인 유권자 비율이 미국 전체 흑인 유권자 비율(약 14%)의 배를 넘는 약 30%에 달하는데, 흑인 유권자들의 표심 변화가 이번 대선 승부에 중대 변수로 거론된다.
조지아주에서는 1996년부터 공화당 대선 후보가 6연승 가도를 달렸지만 2020년 대선에서 불과 0.2% 포인트 차이로 바이든 대통령이 당시 현직이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을 누르면서 대권을 거머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지아주에서 바이든 대통령에 불과 1만1천여 표 차이로 패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주 총무장관에게 결과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하는 등 ‘대선 결과 뒤집기’를 시도한 혐의로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검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카운티 검사장과 특검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 논란이 불거진 데다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공적(公的) 행위에 대한 형사상 면책특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한 연방 대법원 결정의 영향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형사사건 전체 절차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관련 사법 리스크를 사실상 떨쳐 냈다.
최근 각종 기관의 조지아주 여론조사에서는 초접전 양상 속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차범위 안에서 우세를 보이는 조사가 해리스 부통령 우세 결과보다 많이 나오는 양상이다.
선거분석 사이트 ‘270투윈(to win)’은 지난 11일 이후 발표된 모닝컨설트,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의 조지아주 여론조사 결과 6건을 종합한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48.8% 대 47%로 1.8% 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상대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했던 조지아주 한인들의 표심에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시아·하와이 원주민·태평양 제도 주민(AANHPI) 유권자 단체인 ‘APIA 보트'(vote)의 7월 조사를 보면 한국계 유권자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율은 2020년 51%에 올해 38%로 낮아졌다.
주로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 문제가 오랫동안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온 한인들의 마음을 트럼프 전 대통령 쪽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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