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토 라티, 바롤로 최초로 토양 지도 작성
프렌치 오크통 쓰는 모던 바롤로의 선구자
점토 토양 라모라 상징하는 와이너리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내가 가장 마셔보길 갈망했던 와인은 레나토 라티(Renato Ratti)의 오케티(Ochetti)였다. 라티의 수많은 와인이 있는데 20유로 남짓한 중급 수준의 이 와인을 열망했던 까닭은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 셰프가 늘 마시던 와인이기 때문이었다.
셰프인 프랑코는 친절하게도 가끔 커피를 끓여주거나 와인을 따라주긴 했지만 이 레나토 라티 와인은 늘 예외였다. 그는 이 와인을 놔뒀다가 일이 끝나면 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 그래서 내가 레스토랑이 쉬는 날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산 와인이 이 오케티였다.
바롤로보다 한등급 아래인 네비올로이지만 이 와인은 구조감이 좋았고 무엇보다 바롤로처럼 제맛이 나오기까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이 와인을 이탈리아 유학시절 즐겨 마셨다.
이게 습관이 되다보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와인을 많이 마셨다. 한국에서 시판되는 웬만한 바롤로 와인보다 훨씬 맛이 있었고 가격도 5만원대로 훨씬 저렴했다. 다만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바롤로도 아니고 네비올로다 보니 와인에 대한 한국인의 통큰 씀씀이에서는 눈에 차지 않는 와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레나토 라티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다 상당히 놀라운 점을 알게 됐다. 이 레나토 라티(창업자의 이름이 와이너리 이름이다)가 모던 바롤로의 선봉이었다는 점이었다. 레나토 라티는 1971년 바롤로의 땅을 프랑스의 부르고뉴나 보르도처럼 땅의 토양을 구분하고 등급을 매겼다. 당시 바롤로는 프랑스처럼 토양에 따른 등급제가 도입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이 지역 포도인 네비올로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이 네비올로가 어떤 토양에서 나오는지를 연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던 바롤로의 선봉장다웠다. 레나토 라티가 시작한 이런 새로운 시도는 다른 양조가들의 동참을 얻어냈다. 그러면서 커다란 바리크인 보티에 4~5년을 저장하는 예전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프렌치 바리크를 사용해 2~3년을 저장하는 새로운 양조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모던 바롤로의 탄생이었다.
이후 다른 와이너리의 양조가들도 토양을 세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바롤로뿐 아니라 모든 피에몬테 지역의 와이너리들이 토양에 따라 포도를 가려가며 과학적으로 포도를 재배한다. 이 때문에 바롤로의 모든 와이너리 또 지역 와인조합이 운영하는 시음장에 가면 해당 와인의 토양 샘플을 볼 수 있어 바롤로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레나토 라티, 랑게 언덕 굽어보는 전망대 갖춰
레나토 라티는 바롤로에서 가장 점토의 비중이 많은 라모라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진흙에서 자란 포도는 특이하게 장미향이 난다. 그래서 나는 라모라에서 나온 바롤로를 좋아한다. 라모라는 바롤로에서 4~5km 동쪽에 있는 언덕지역이다.
이번 와이너리 방문에 레나토 라티가 들어간 것은 너무 당연했다. 내가 좋아하는 라모라와 레나토의 교집합이기 때문이었다. 레나토 라티는 라모라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와이너리 시설은 원형의 전망대를 갖추고 있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역시 모던 바롤로의 선두주자다웠다. 와이너리 시음장에서 랑게의 평원과 언덕을 굽어볼 수 있었다. 평화로웠다. 멀리 내가 좋아하는 바롤로 와인 메이커인 다밀라노 와이너리가 보였다. 다밀라노의 리스테는 내가 먹어본 가장 맛있는 바롤로였다. 레나토 라티 와이너리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와이너리 두곳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이날 시음한 와인은 레나토 라티의 바롤로인 마르체나스코(Marcenasco)였다. 한국에서도 자주 보이는 라티의 최상급 와인의 하나다. 모던 바롤로라고 하지만 구조감이 단단해서 바로 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꽃향기의 특징은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잔을 계속 돌려보니 딸기 낙엽향도 올라왔다.
레나토 라티 와인의 특징은 꽃향기 베리향인데 이런 향과 맛에 잘 어울리는 음식은 양고기와 송로버섯으로 번역되는 트러플이다. 이탈리아에 오면 늘 즐기는 음식과 와인의 조합이다. 트러플 중에는 화이트 트러플이 가장 맛나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이탈리아에서는 30유로 정도면 아주 작은 알 하나를 살 수 있다. 이 버섯을 사서 트러플 칼로 슬라이스를 내 파스타나 리조토에 올려 먹으면 별미 가운데 별미다. 이 별미와 가장 어울리는 와인이 레나토 라티다. 나에게는 가장 특별한 와인이다. 이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버킷리스트의 하나였다. 이날 나는 이 바람을 이루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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