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원론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통화개혁은 6.25동란 와중에 단행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한창이던 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를 발령,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이를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도록 했다. 전쟁 발발 직후 적군에 의해 불법 남발된 적성통화의 유통을 막고 경제교란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화폐단위의 변경 없이 단지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통화개혁으로 보기는 어렵다.
◆ 1차 통화개혁…”인플레를 잡아라”
액면단위 조정을 포함한 진정한 의미의 제1차 통화개혁은 53년 2월 15일 단행됐다. 조치의 골자는 통화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하고, 화폐호칭을 ‘원’에서 ‘환’으로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기존 화폐 “100원”을 신 화폐 “1환”으로 바꾸어 준다는 것이다.
당시는 막대한 전쟁비용 지출에 따른 통화증발로 악성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통화개혁을 지휘했던 김유택 한은 총재는 “인플레가 어찌나 극심했던지 돈을 가마니로 싣고 다녀야만 거래가 될 정도로 화폐가치가 떨어졌다”고 회고했다.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는 시중의 과잉유동성을 흡수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통화개혁 밖에 방법이 없다는게 당시 정권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정부는 통화개혁을 위한 물밑 작업에 나섰고, 김정렴 당시 한국은행 기획조사과장을 실무집행자로 낙점했다. 김 과장은 10년 후인 62년 군사정권 하에서 단행된 제2차 통화개혁에도 참여하면서 국내 유일무이한 통화개혁 전문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후일 상공장관 재무장관을 거쳐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다.
김 과장이 통화개혁의 실무주역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비상조치를 단행할 수 밖에 없다는 정부의 절박감과 함께 김 과장의 적극적인 사전 준비가 한 몫을 했다.
김 과장은 후일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1차 통화개혁 실무진으로 발탁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중이지만 통화개혁을 단행해 악성 인플레를 조속히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날이 바쁜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제2차 대전 후 각 국의 통화개혁에 관한 연구를 행외비 자료로 작성해 제출했다.” (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김 과장의 연구자료를 접한 김유택 한은 총재는 52년 7월 김 과장을 집무실로 불러 “우리나라에서 통화개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 김 과장의 생각을 극비리에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한다.
김 과장의 회고.
“두 달 후인 52년 9월 재무부 장관실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백두진 재무장관은 “한은 총재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며 “통화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데 해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저없이 “해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정말 훌륭한 계획을 짜낼 자신이 있었고 하등 두려움이 없었다.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며 백 장관이 내민 서약서를 보니 만일 위반시에는 총살에 처한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제1차 통화개혁을 위한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재무장관으로부터 공식 지시를 받은 김 과장은 이후 6개월간 은신하며 비밀작업을 진행한다.
◆ 국회 비협조로 실패한 “미완의 개혁”
마침내 53년 2월 통화개혁 방안이 성안됐다. 최종 검토작업을 거쳐 백두진 재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이 대통령은 “긴급통화조치에 즈음한 대통령 담화문’을 친필로 작성해 첨부했다.
시행일은 구정(설날) 다음날인 2월 15일로 결정됐다. 통화개혁 공표일을 설 연휴로 정한 것은 대부분 국민들이 구정과세를 치르기 위해 먹을 것을 많이 장만해 둔 만큼 통화개혁에 따른 생활상의 불편을 다소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또 국회가 휴회하는 시기를 택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함으로써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 있었다.
2월15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1차 통화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53년 2월 17일부터 구화폐인 ‘원’화의 유통을 금지하고 신화폐인 ‘환’화를 발행한다.
– 2월 17일부터 금융기관 예금의 인출 또는 지급을 9일간 금지한다
– 새로 발행된 ‘환’화와 구 ‘원’화의 환가비율은 환 1에 대하여 원 100으로 한다
– 구 은행권과 수표 등 원화표시 지불지시는 2월 17일부터 25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해야 한다
– 25일까지의 생활비로 세대별로 1인당 500환 한도내에서 신권으로 지불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기존 화폐 100원을 신 화폐 1환으로 바꾸어 주고, 일정기간 예금 인출을 중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들과 명절을 즐기던 와중에 터져 나온 긴급통화개혁 조치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통화개혁이 무엇이며, 왜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일반 국민들로서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일부에서 매점매석 행위가 벌어지고 물가가 오르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통화당국의 적극적 대처로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정부는 통화개혁 조치 발표에 이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2단계 조치로 긴급금융조치법안을 2월 25일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예금동결과 지불제한을 통해 시중에 유포된 과잉구매력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금융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자 국회의원들간에 예기치 못한 논쟁이 벌어졌다. 상당한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부유층 국회의원들이 정부안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논의의 쟁점은 “예금 지불제한 조치를 정부안대로 수용할 것인가”로 집중됐다.
국회는 이틀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결국 지불제한 규정을 대폭 완화하는 형태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스스로 자산가이자 기득권층인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경제적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금융조치법이 국회에서 완화 처리되면서 지불제한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던 정부의 통화개혁 의도는 빛을 잃었다. 조치대상 금액 89억환 가운데 75%에 달하는 67억환이 이런저런 이유로 지불제한 대상에서 제외됐고 22억환만이 동결조치됐다. 과잉유동성을 잡기에는 턱없이 적은 규모였다.
전란의 와중에 호기롭게 추진된 제1차 통화개혁은 인플레 억제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국 “미완의 개혁”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