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 1년만인 1962년 6월 제2차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53년 2월 1차 통화개혁 이후 10년만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이 서둘러 통화개혁을 단행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개발을 위한 ‘산업자금 조달’이라는 숙제가 깔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62년초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했고 이의 실행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의지처였던 미국이 경제개발계획에 부정적 입장을 밝히면서 미국으로부터의 외자조달이 봉쇄되는 난관에 처했다.
◆ 특명 “산업자금을 조달하라”
군사정부가 결국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통화개혁을 통한 ‘내자조달’ 방안이었다. 통화개혁을 통해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동결한 후 이를 산업개발공사에 강제 투자토록 하고, 공사가 투자한 기업이 자립하게 되면 그 자금을 회수해 다른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산업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독재적 발상이지만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정부는 극단의 비상조치인 통화개혁도 군대 스타일로 밀어부쳤다. 원하는 방향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나중에 전문가를 투입해 이미 그린 그림에 맞춰 계획안을 짜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진행구도가 이렇다 보니 통화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한국은행 총재는 물론 경제기획원 장관 등 핵심 경제관료들이 통화개혁 추진 과정에서 배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제정책 수장들은 통화개혁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발표 직전에야 통보받고 어이없어 했다. “아무리 군사정부라지만 너무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병도 당시 한은 총재는 통화개혁 조치가 발표되자 천병규 재무장관을 찾아가 “통화개혁의 각종 발표문이 한은 총재 이름으로 나가야 할텐데 나 자신이 이번 통화개혁에 대해 일언반구 사전통고 조차 받지 못했으니 허수아비 총재가 아니냐“며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군사정권 지도부내에서 통화개혁이 결정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통화개혁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통화개혁 구상 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61년 9월 박정희 의장이 통화개혁을 해야겠다는 의사를 밝혀 주한 영국 외교기관을 통해 영국 정부에 인쇄 의뢰를 했다. 그 해 11월 정래혁 상공장관이 영국정부 초청 형식으로 들러 정식 발주를 했다.”
통화개혁 실무를 담당할 경제전문가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개혁의 윤곽은 물론 신화폐 인쇄발주 등 주요 작업이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통화개혁 실무를 담당할 책임자로는 1차 통화개혁 당시 밑그림을 그렸던 김정렴씨가 다시 차출됐다. 김정렴씨는 당시 한국은행 소속으로 중앙정보부에 파견 근무를 나가 있었다. 김정렴씨가 2차 통화개혁과 관련해 군사정부와 첫 접촉을 갖는 시점은 62년 2월로, 이미 신은행권 인쇄작업이 비밀리에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김정렴씨의 회고.
“62년 봄 천병규 재무장관을 통해 최고회의 재경위원인 유원식 장군을 만났다. 유 장군은 “통화개혁을 할 생각은 없고 참고하고자 할 뿐”이라며 2차대전 이후 각 국의 통화개혁 실례, 우리나라 통화개혁시 사전준비사항, 통화개혁의 구체적인 내용, 사후대책 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김정렴씨는 한 달여의 작업끝에 통화개혁 전반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를 살펴본 유 장군은 몇가지 요강이 적힌 문안을 주면서 좀 더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정렴씨의 이어지는 회고.
“유 장군으로부터 받은 요강의 골자는 한마디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행에 필요한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 통화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준비팀은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서라면 통화개혁이라는 비상조치에 의하지 말고 전통적인 재정금융 수단에 의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의견을 정리하되 기획안은 작성해 올리기로 결정했다”
김정렴씨는 5월 17일 박정희 의장을 상대로 기획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서라면 통화개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신은행권 인쇄가 이미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등 통화개혁 실무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통화개혁 실무 집행자인 김정렴씨가 신은행권의 인쇄 사실을 처음 알게 되는 것도 이날 설명회 자리에서였다. 김 씨의 이어지는 회고.
“설명이 끝나고 난 후 통화개혁에 사용될 새로운 은행권이 다음날 부산항에 입항되며 법령, 공고문, 해설 등 제반 인쇄 등을 감안해 6월 10일 개혁을 단행하기로 이미 결론이 내려진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한국은행 출신 작업반들은 통화개혁 실시 여부는 확정된 바 없으며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안을 짜라는 말만 들어왔다. 그런데 벌써 신은행권이 외국에서 인쇄되어 부산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 군사정부 밀어부치기 행정의 대표적 실패 사례
2차 통화개혁은 군사정부가 그린 그림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됐다. 마침내 6월 9일 최고위원 전원과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긴급통화조치법이 의결, 공포됐다.
6월 10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2차 통화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62년 6월 10일부터 구 ‘환’화의 유통을 금하고 신 화폐인 ‘원’화를 발행한다.
– 신화폐 ‘원’과 구화폐 ‘환’의 환가비율은 원 1에 대하여 환 10으로 한다.
– 구권과 지불어음은 6월 10일부터 17일까지 신고 또는 예입해야 한다.
– 17일까지의 생활비로 세대별로 1인당 500원 한도내에서 신권으로 지불한다.
기존 화폐 ‘10환’을 신 화폐 ‘1원’으로 바꿔 준다는 것이었다.(이후 우리나라 화폐는 지금까지 ‘원’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조치 결과 구권 발행액의 97%에 달하는 1622억환이 신고접수됐다. 그러나 5.16 이후 부정축재 처리과정에서 은폐된 음성자금이나 투기성자금이 상당량 존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00만환 이상의 거액예입 건수는 0.2%, 금액으로는 14.8%에 불과했다.
신고된 금액 중 5만환 이하가 전체의 50%, 100만환 이하가 85%를 차지하는 등 주로 소액권 소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장롱 속에 거액을 숨겨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던 군사정부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한국조폐공사, 화폐전사)
성과는 미진한데 반해 통화개혁에 따른 부정적 파급은 막대했다. 통화개혁 한 달 후인 7월 9일 중소기업 가동률은 57.7%로 떨어졌고, 유통시장은 사금융 두절로 인해 극단적인 자금고갈 현상을 빚었다. 유휴자금 활용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경제 부작용만 양산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국민적 비난이 고조되자 군사정부로서도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긴급금융조치법을 통해 예금동결을 일부 완화한데 이어 7월 13일에는 아예 봉쇄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를 발표, 예금동결을 사실상 전면 해제해 버렸다. 통화개혁을 왜 단행했는지 목적 자체를 의심케 하는 전면 후퇴 선언이었다.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했을 뿐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충격파만 준 조치였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제2차 통화개혁은 결국 유휴자금의 산업자금화에도, 인플레이션 억제에도 성공하지 못한 채 33일만에 막을 내렸다. 60년대초 군사정부가 단행한 밀어부치기식 행정의 대표적인 실폐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