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삼치의 하얀 뱃살…리슬링과 조화
레몬·귤맛 한스베어리슬링…뛰어난 가성비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겨울철 사람들은 제주도 하면 방어를 떠올린다. 맞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제주 방어의 맛은 깊어진다. 거기에 대방어에만 나오는 뱃살이나 뱃살과 등살 사이의 사잇살은 제주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진미다.
그렇지만 와인을 즐기는 나에게 겨울철 제주의 최고 생선을 묻는다면 삼치를 꼽는다. 삼치는 봄이 제철이기도 하지만 날씨가 쌀쌀해지는 늦가을부터 기름이 올라 맛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삼치가 다소 밍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치를 많이 먹는 부산에서는 매운 양념을 해서 구워먹기도 한다. 하지만 단맛이 돌고 담백한 삼치는 일본에서는 구이로 인기다. 일본에서는 삼치를 도미와 함께 잔치 음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구이로는 별 인기가 없는 삼치는 회로 먹으면 어떨까? 별미중의 별미다. 등푸른생선인데도 살이 워낙 담백하다보니 요리사의 상상력이 발휘되기 최적인 캔버스 같은 생선이다. 어떤 양념과도 잘 어울린다.
제주에서 삼치회를 먹는 방법은 삼치가 많이 잡히는 추자도에서 건너왔다. 그래서 삼치횟집에 추자도의 지명이 많이 붙어 있다. 추자도에서는 삼치를 주로 잘 익은 김치와 먹는다. 특히 향이 강한 파김치와 갓김치와 함께 먹는다. 묵은지도 삼치 살과 아주 조화롭다.
삼치 살은 보통의 등푸른생선들처럼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뱃살과 등살이다. 딱 봐도 살의 색깔이 다르다. 뱃살은 얇게 붙어있는 붉은색 부위를 제외하면 거의 흰색이다. 씹지 않아도 부드럽게 녹는다. 쫄깃한 식감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추자도에서는 삼치 살을 김치와 김을 싸서 먹는 것이다. 등살은 뱃살보다 어둡다. 뱃살보다는 쫄깃하지만 광어살보다 더 부드럽다.
나는 삼치의 뱃살은 고추냉이와 간장을 찍어 먹는다.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다. 여기에는 스테인레스 숙성을 하지 않은 리슬링이나 쇼비뇽 블랑 같은 와인이 어울린다.
제주의 지역 마트에 가니까 삼치회를 생선코너에서 팔았다. 2만원이었다. 보통 1인분에 5만원하는 횟집과에 견주면 저렴했다. 작은 마트였지만 와인을 많이 진열해 놓았다. 1년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나는 제주에서 2023년 두달 살기를 했었다). 와인 애호가로 반가웠다.
일단 회에는 독일 리슬링이다. 독일 리슬링은 당도도 산도도 강해서 우리나라 청주와 비슷하다. 한식과는 물론 중식이나 일식과도 궁합이 좋다. 회에는 더할 나위가 없다.
이날 마트 와인 진열대에서 눈에 띈 리슬링은 한스 베어 트로켄. 트로켄은 독일어로 드라이하다는 뜻이다. 곰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리슬링인데다 자전거 타는 곰. 1만원대 가격.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조합이었다. 4~5만원 대의 리슬링도 있었지만 여행 첫날이니까 경비를 아끼기 위해 패스했다.
나는 숙소로 가서 친구와 함께 삼치회를 놓고 리슬링을 땄다. 삼치를 추자도 식으로 먹기 위해 쪽파, 열무김치, 된장을 함께 가져왔다. 한스 베어 리슬링은 정말 깔끔했다. 차갑게 마실려고 냉동실에 넣어두어서 그런지 명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레몬향과 시트러스 향이 올라왔다. 야 이게 만원짜리 맛이야라는 말을 되뇌이게 만들었다.
삼치 뱃살은 마트에서 샀지만 부드러웠다. 삼치를 처음 먹는 친구는 연신 감탄을 했다. ‘2만원짜리 마트표인데 사람을 감탄하게 하다니. 역시 제주도다’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여러 양념 가운데 삼치 뱃살은 그냥 고추냉이와 간장이 가장 어울렸다. 입에 도는 삼치의 기름기와 생선 특유의 향을 리슬링이 싹 씻어준다.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대조형 페어링이었다.
그렇지만 와인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리슬링에서는 사과와 배 그리고 미네랄감과 꿀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싼 와인에서나 느낄 수 있는 시간에 따른 와인의 변주다. 당도가 낮은 트로켄 등급인데도 이런 복합적인 맛이 나다니. 리슬링의 복합적인 풍미는 삼치 뱃살이 가진 단맛과 고추냉이의 상큼함과 잘 어울렸다. 장점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일치형 페어링이다. 1만원대의 와인에서 두가지의 페어링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운 가성비였다. 하지만 와인이 금세 정점을 지나 구조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차갑게 해서 마셨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쉽게도 삼치의 뱃살과 달리 등살은 별로였다. 등살에서는 약간의 비린내가 났다. 피를 온전히 못 빼서 그런지 경직돼 있었고 약간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고등어, 삼치, 방어같은 등푸른 생선은 근육에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높아 회를 잘 못 뜨면 쇠맛이 난다. 그래도 쪽파와 된장 그리고 상추를 싸서 먹었더니 먹을 만 했다.
친구와 11월 제주 바람이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리슬링 잔을 기울였다. 삼치살의 부드러움 탓일까? 슈베르트 가곡 ‘마왕’의 피아노 연주처럼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드는 겨울철 제주 바람소리가 이날은 부드럽게만 들렸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숙소 앞 큰 키의 멀구슬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기분좋게 화음을 맞춰준다. 제주 삼치와 독일 리슬링이 만든 조화가 아닐까.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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