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고속도로’라는 생소한 용어가 국민들에게 처음 전해진 것은 67년 4월이었다. 그해 5월 있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직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고 있던 때다.
박 후보는 4월 29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가진 유세에서 4대강 유역 개발을 포함한 국토건설계획을 언급하면서 “빠른 시일내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다. ‘고속도로’라는 생소한 단어가 국민들에게 처음 언급되는 순간이었다.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64년 12월 열흘간의 서독 방문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당시 서독이 자랑하던 아우토반을 주행하면서 아우토반이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요 원천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같은 분단국가이면서도 서독은 패전의 좌절과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 안에서 에르하르트 당시 서독 수상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경제 하부구조에 대한 공공투자를 과감하게 하십시오. 히틀러는 독재자였지만 독일 국민에게 아우토반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지형은 산악이 많고 지역간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일수록 대동맥을 뚫어야 합니다.”
아우토반의 감동은 박 대통령에게 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심어줬고, 이 꿈은 6년 후 경부고속도로 준공이라는 대역사로 이어진다.
◆ “자동차 한두대 지나갈까 말까 하는 나라에 웬 고속도로?”
서독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곧바로 고속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건설 전문가들이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탐독하는가 하면 각 국의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대한 기록들을 밤늦도록 검토했다.
고속도로 건설에 시공업체로 참여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후일 한국도로공사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이 밤늦게 불러 들어가 보면 많은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 있는 서재로 데려가 손수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 보이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속도로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짧은 기간에 완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의견을 묻곤 했지요”
2년여에 걸쳐 개인적인 연구를 끝낸 박정희는 67년 10월 주원 건설부 장관을 불러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내년초 착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며 고속도로 건설을 공식 지시한다. 정부는 11월 14일 여당과 연석회의를 열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을 최종 확정하고, 곧바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 실무작업에 착수했다.
68년 2월 1일 박 대통령은 서울 원지동(현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거행된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기공식에 참석, 발파스위치를 눌렀다. 폭음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남쪽 바위산의 암벽이 쪼개졌다. 4년 전 서독 아우토반에서 품었던 고속도로 건설의 꿈이 바야흐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의견이 들끓었다. 당시 1년 예산이 1500억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전체 예산의 3분의 1 가까이를 쏟아 부어야 하는 고속도로 건설은 국민들에게 다분히 무모한 공상으로 비쳐졌다.
야당은 물론 언론들까지 나서 일제히 반대론을 쏟아냈다. “국도에도 차량이 한 두대 지나갈까 말까 하는 마당에 무슨 고속도로가 필요하냐” “고속도로에 투입할 자금이 있으면 다른 경제분야에 지원하는 것이 더 낫다”는 등 반대론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심지어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내에서 조차 반대론이 득세했다.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통령의 의지 때문이었다.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의지는 확고했으며, 그 어떤 반대의견에도 꿈적하지 않았다.
당시 기획원 예산국장을 맡았던 김주남씨의 회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우리의 경제규모가 작고 어려운 상황이어서 사실은 나도 반대 입장이었다. 도저히 재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찬성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대통령이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기획원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많았지만 대통령이 워낙 강하게 나오니 그저 따라간 것이다. 그 때 차관붐이 한창 일었지만 외국에서도 고속도로 건설에 차관을 줄 리 없었다. 타당성 조사에만도 몇 년이 걸릴 일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런 문제점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김흥기, 영욕의 한국경제)
◆ “공사비 300억원…서울~부산을 뚫어라”
논란 끝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방침이 확정되자 우선 결정해야 할 것이 노선이었다. 고속도로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를 거쳐,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건설부에서 몇 가지 방안을 놓고 검토한 끝에 현재 노선인 서울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남단을 기점으로, 부산 동래구 구서동에 이르는 428km 구간이 최종 확정됐다.
이제 남은 것은 사업비 추정과 재원조달 문제였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재무부, 건설부, 서울시, 육군공병감실, 현대건설 등에 각각 소요 사업비를 산출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각 기관이 보고한 사업비는 ▲재무부 330억원 ▲건설부 450억원 ▲서울시 180억원 ▲육군공병감실 490억원 ▲현대건설 280억원 등으로 편차가 컸다. 국가 대동맥을 뚫는 엄청난 공사에 맞춰 견적을 뽑을만한 비교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제기획원은 아예 사업비 추정을 포기했다.
박 대통령은 기관들이 보고한 내용을 검토해 서울시 180억원과 건설부 450억원의 중간치인 315억원과 현대건설이 제안한 280억원을 감안해 최종 300억원으로 사업규모를 확정했다. 건설재원은 휘발유 세율을 100% 인상하고, 도로공채를 발행하는 한편 대일청구권 자금 27억원 등으로 충당키로 가닥을 잡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결과적으로 총 428억원이 투입돼 당초 계획보다 128억원 가량 더 많은 자금이 소요됐다. 하지만 이 정도 금액은 당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고속도로 건설재원의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저렴한 비용으로 ‘세계 최저가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이정표를 세운다.
◆ “땅 내놓는게 애국”…한없이 순박했던 민심
사업비 책정이 마무리 되자 정부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용지 매입에 착수했다. 정부는 용지 매입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 시도, 시군읍면 별로 후원위원회를 구성해 땅값 낮추기 경쟁을 유도했다. 자연히 시장 군수들간에 경쟁이 일어났다.
‘토지구획정리’라는 명분 아래 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경부고속도로 기점인 제3한강교 남단에서 남쪽으로 7.6km 9만2000여평의 땅이 토지구획정리 명분 아래 무상으로 확보됐다.
이처럼 무상으로 확보된 용지외에 확보 안 된 민간소유 용지 582만7000평은 소유주와의 합의를 거쳐 사들여야만 했다. 지금은 도로건설 비용의 40%가 토지매입비로 책정되지만 당시 민심은 한없이 순박했다. 고속도로 용지대금을 낮추는 것이 곧 애국하는 길이라는게 당시 국민들의 인식이었고, 토지 소유주들도 군소리 없이 정부의 용지매입 지침에 따랐다.
토지 소유주들의 순박한 협조 속에 528만7000평의 용지를 총 18억7667만원의 예산으로 모두 사들였다. 평당 평균 354원의 가격으로 사들인 셈이다. 50여년전 일이라고는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값이었다. 당시 파고다 담배 한 값이 40원, 쌀 한가마 4350원 하던 때였다.
경부고속도로가 2년5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공적으로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순박하기 그지없는 국민들의 협조와 지원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 “안되면 되게 하라”
경부고속도로는 여러 면에서 놀랄만한 기록들을 세웠다. 2년5개월이라는 짧은 공사기간에 총연장 428km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순전히 우리 자본과 기술로 건설했다. 건설비용으로는 총 428억원이 소요돼 km당 1억원이라는 경이적인 비용으로 공사를 마쳤다. IBRD는 당시 보고서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선진국 수준으로 건설하려 했다면 km당 5억원, 최소 2140억원의 자금이 소요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선진국의 5분의 1 비용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던 데는 “先개통-後보완” 원칙이 크게 작용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살림에 처음부터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우선 개통시켜 이용하면서 통행료 수입내에서 보완해 나가자”며 선개통-후보완 원칙을 제시했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산정의 논리적 토대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박 대통령의 밀어부치기 사례는 공기 단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년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428km 대동맥을 뚫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통치권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면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첫 구간인 서울~수원간 공사로, 일체의 행정절차를 무시한 사전공사로 진행됐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른다면 경제기획원에서 각 부별 예산이 배정되고 이 예산이 부처별로 재배정되어야 비로소 건설부 고속도로 건설단에 예산이 확보된다. 이후 재무부 국고국에서 사업발주 승인을 받아 조달청으로 서류가 넘어가면 발주가 공고되고, 건설업체 입찰-심사-낙찰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행정절차를 준수했다면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공사는 5개월여 이상 지체됐을 것이고, ‘2년5개월 완공’이라는 공기목표 달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종성 당시 건설부 차관(8대 국회의원 역임)의 회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2차 5개년계획 연도안에 완성되어야만 했습니다. 3차 5개년계획 때 이 도로를 이용해 새로운 경제계획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지요. 기간내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임무가 건설부 및 현장 직원들의 가슴속에 사명감처럼 와 닿아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밀어부치기는 국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법안 날치기 통과도 감행됐다.
68년 2월 28일. 고속도로 건설재원으로 사용될 석유류법 개정안이 회기를 하루 남기고 국회에 제출됐다. 고속도로 건설비용 마련을 위해 휘발유 값을 100% 인상하는 내용이었다. 법률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건설 작업이 상당기간 지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여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회기 마지막날인 2월 29일 오후 4시 40분 석유류세법개정안과 도로정비촉진에 관한 법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다. 그러나 당시 여야간 쟁점이었던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둘러싸고 본회의는 파행을 거듭했고, 국회의장은 결국 6시 40분 정회를 선언해 버렸다. 회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5시간 남짓.
다급해진 여당 수뇌부는 한밤중에 청와대로 집결했다. 밤 10시 30분 김종필 당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 이만섭 부총무 등이 박 대통령과 마주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경제 살리겠다고 고속도로 만들겠다는데…야당이 반대한다고 그걸 하나 통과 못 시켜?”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통령에게 질책을 받은 여당 수뇌부는 회기 종료 40분을 남긴 밤 11시 20분 국회로 돌아왔고 결국 날치기 통과를 감행했다. 여야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장형순 국회부의장이 의사봉 대신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본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두 개 법안을 일괄 통과시켰다. 회기 종료를 불과 5분 남놓고 이뤄진 날치기였다.
이만섭 당시 공화당 부총무의 회고.
“대통령에게 혼쭐이 나고는 허겁지겁 청와대를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김진만 총무에게 “이거 합시다. 해야지 어쩝니까”라고 말했지요. 이 때 부터 국회에 돌아와 단상 점거하고 법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불과 30분도 채 안 걸렸을 겁니다. 사람이 한번 혼이 나고 나니깐 전부 달라집디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 작사, 작곡, 지휘
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다. 긴 교량 32개와 짧은 교량 328개를 건설하고 터널 12개를 뚫는 대역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에 투입된 연 인원만 900만명에 달했다.
이날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기념식에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체이자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며 건설 참여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가져온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국가 전 부분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국토의 1일 생활권화가 가능해졌으며,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 원활해지고 대도시 집중이 가속화되는 등 새로운 사회현상들이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교통수송 및 유통구조가 급속히 개선되면서 그 자체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사방에 막혀 있던 산맥들을 뚫으면서 말 그대로 “조극 근대화의 길”로 부상했다.
국민 각 자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보고 경제 및 생활상의 여러 변화들을 체험하게 되면서 초기 고속도로 건설에 쏟아졌던 비난은 사라지고 어느새 “지지”와 “격찬”으로 바뀌었다. 만일 당시 국민적 반대 여론에 굴복해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을 미루거나 늦췄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아마도 한강의 기적은 20년 이상 지연됐거나 아예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각도에서 엇갈린다. 하지만 그가 불도적식으로 밀어부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국 경제개발의 주춧돌이 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혈맥’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온갖 반대와 장애요인을 무릅쓰고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한 박정희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국가의 CEO로서 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직접 기획하고 실천에 옮겨 만들어낸 성과물이었다.
`한국도로공사 15년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하나의 거대한 합창이나 교향악에 비유한다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작사, 작곡, 지휘로 이루어진 불멸의 걸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