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19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야간 통행금지를 20여분 앞두고 충격적인 ‘사채동결조치’가 발표됐다.
기업들이 떠안고 있는 사채를 동결해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명령’ 이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초법적 조치였다. 반향은 즉각적이었다. 사유재산권 침해이자 부실기업에 특혜를 주는 위법조치라며 각계의 반발이 잇따랐다.
하지만 정권 지도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 파급이 큰 사안인만큼 국회에서 사전 공개토론을 할 수 없었고, 만일 그렇게 했다면 실효성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며 긴급명령 발동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초법행위였다.
◆ “기업을 살려라”…전경련 회장단 대통령에 건의
8.3 사채동결 조치가 내려진 배경에는 전경련의 역할이 컸다. 전경련은 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난이 가중되자 대통령에게 이 같은 상황을 직소키로 하고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71년 6월 11일 박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와 김학렬 부총리, 남덕우 재무부 장관 등을 배석시킨 가운데 김용완 전경련 회장, 정주영 부회장 등을 만나 경제계의 의견을 청취한다.
김 회장은 이 자리에서 재계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전반을 설명하고, 특히 기업들의 사채이자 부담이 커 부실기업이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해결책으로 기업사채를 은행에서 떠맡아 줄 것과 세금감면, 금리인하 등 특단의 대책을 요청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정렴씨의 회고.
“김 회장은 고리사채에 대해 정부가 비상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모든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역설했지요. 특히 자신이 경영하는 경성방직도 사채를 쓰고 있었는데 최근 공장부지를 팔아 다 정리했다면서 조금도 사심없는 건의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김정렴, 한국 경제정책 30년사)
◆ 환율절상, 차관 상환…기업 자금사정 압박
60년대 우리나라는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면서 공업화와 수출증대를 기반으로 사상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사상누각인 측면이 적지 않았다. 자기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타인자본, 특히 사채 의존도가 높다 보니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이자갚기에 급급한 형국이었다.
여기에 물가상승과 환율인상 등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제2차 경제개발계획 후반기인 70~71년 들어 기업들의 자금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불황의 여파는 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났다. 69년 13.8%에 달했던 경제성장률은 ▲70년 7.6% ▲71년 8.8% ▲72년 5.7% 까지 떨어졌다. 수출증가율도 68년 42%에서 ▲69년 34% ▲70년 28%대로 하락했다.
자금, 생산, 판매, 고용 등 경제 전반에 걸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부도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러다가는 3차 경제개발계획은 물론 중화학공업 육성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 기업들의 경영여건이 이처럼 악화된 것은 60년대 중반 도입한 외국 사업차관의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면서 기업들의 자금사정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가 수출촉진을 위해 환율을 18% 대폭 평가절하한 것도 기업들의 원리금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재로 작용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일제히 경영난에 봉착한 것은 당시 국내 기업들의 자본축적에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증권시장에서 유가증권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당시는 유가증권 발행시장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한 시절이었다. 자기자본을 확충할 방법이 없다 보니 기업들은 급전 필요시 은행의 단기자금을 차입하거나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사채업자가 기업 목줄을 쥐고 흔들던 시절
증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70년대 사채시장은 기업들의 중요한 자금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명동과 소공동 등을 중심으로 적어도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형상 출판사나 전화거래상 등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채공급자로부터 돈을 끌어와 대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일에 전념했다.
당시 사채의 가중평균금리는 월 3.84%로 연 46%를 넘는 고금리였지만 돈을 구할 수 없는 기업들은 이 돈이라도 감지덕지 써야 할 형편이었다. 문제는 이들 사채중개업자들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차입기업들의 경영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부 사채업자 가운데는 상근직원을 채용해 차입자인 대기업별로 담당을 맡겨 차입기업의 경영사정, 재무상태, 단기전망 등을 분석하고 자금이동 상황을 면밀히 체크했다. 대기업의 경영현황이 사채업자 파견 직원에 의해 매일 평가되고 보고되었던 것이다.
특정 기업의 자금사정이 악화돼 부실화할 우려가 있다고 평가되면 이들은 즉각 해당 기업의 정보를 교환했다. 정보교환 결과 부실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면 사채업자들은 거의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해당기업 어음을 교환에 돌려 버렸다.
일시에 어음이 돌아오면 차입기업은 이를 막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부도로 이어졌다. 대기업이 부도를 맞게 되면 그 기업의 어음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까지 연쇄 부도로 이어지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커져 갔다. 대기업들이 모인 전경련내에서도 상당수 회원사들이 언제 사채업자들로부터 어음교환을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 “극비 보안을 유지하라”
전경련 회장단으로 부터 연쇄부도 가능성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참모들을 통해 사실확인 작업에 나섰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전경련 건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대통령의 질문에 “김 회장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며, 사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채를 일정기간 동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고했다.
상황을 파악한 박 대통령은 즉각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사채동결을 통해 당장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 기업공개를 유도해 기업들의 직접자금 조달을 원활하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사채동결을 위한 실무대책반장에는 금융 전반은 물론 상법 민법 등에 두루 밝은 김용환 당시 청와대 외자담당비서관(후일 재무부장관 역임)이 선임됐다.
71년 9월 김 반장은 소수의 엘리트 작업팀을 꾸려 비밀작업에 착수한다. 작업팀에는 김 반장의 대학 동창이자 상법 전문가인 김종현 당시 주택은행 부장(후일 주택은행 전무), 정영의 재무부 이재2과장(후일 재무부장관 역임), 성준경 한국은행 조사역(후일 한미은행 전무), 심형섭 청와대 비서관(후일 대한보증보험 사장 역임) 등이 참여했다.
작업팀이 준수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보안 유지’였다. 사채동결 사실이 사전에 유포될 경우 모든 사채가 일시에 기업에서 빠져나가 연쇄도산을 일으키고 결국 금융공황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김용환 전 장관의 회고. “사안의 성격상 비밀유지가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작업팀원 모두로 부터 보안유지 서약서와 사직서를 받았놓고 일을 시작했지요.” (김용환 회고록)
작업팀의 일상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작업팀은 보안을 위해 회현동에 있는 뉴남산관광호텔과 평창동 올림피아호텔,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등을 오가며 작업을 진행했다. 혹시라도 호텔 직원이 의심할까 싶어 방안에 “경주종합개발계획”이라는 가짜 챠트를 걸어 놓기까지 했다. 복사기가 고장날 경우를 대비해 작업팀원 중 한명이 복사기 회사에 가서 직접 복사기를 분해, 조립하는 방법을 배워 오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당초 사채동결조치 발표 D데이는 72년 1월 15일로 잡혀 있었다. 작업팀은 발표 일정에 맞춰 73개 조항으로 구성된 대통령 긴급명령과 관련 세법시행령 개정안, 특별금융조치 시행안 등 사채동결과 관련된 모든 조문작성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놓고 여야가 극한 대립양상을 빚는 등 정국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자 청와대에서 긴급조치 단행을 연기할 것을 요청해 왔다. 실무팀은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호텔에서 철수했다.
◆ 한밤중의 긴급조치
정국이 안정을 되찾은 72년 6월, 사채동결조치의 D데이가 8월 3일로 조정됐다. 작업팀은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 모여 마무리 점검에 나섰다. 보안유지를 위해 호텔 한 개 층을 통째로 전세내 작업을 진행했다.
7월말 모든 문서작업을 마무리 지은 김용환 반장은 대통령 재가에 앞서 국무총리와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장관, 건설부 장관 등 관계부처 장관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각 장관실을 방문한다.
김 전 장관의 회고.
“김종필 총리 뿐만 아니라 서명인 모두가 내용은 묻지 않고 서명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채에 관한 특별조치에 관해서는 성격상 전모를 미리 알아서는 안된다는 각 자의 양해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침내 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서 8.3조치가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형식으로 의결, 공포됐다.
긴급조치의 골자는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72년 8월 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되며 ▲정부가 2000억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저리 대출로 대체해준다는 것이었다.
채무자는 신고한 사채를 3년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상환하되 이자율은 월 1.35%로 낮췄다. 당시 사채 평균이자가 월 3.84%였던 만큼 긴급조치로 인해 기업의 사채이자 부담이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경감된 셈이었다.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막중한 재정부담을 무릅쓰고 기업을 지원하는 이유가 기업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며 “기업의 건실한 성장 없이는 경제발전과 국민생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긴급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 드러난 “지하경제” 규모…신고사채만 3456억원
8.3조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발적인 사채신고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시행 초기 신고실적은 매우 저조했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신고하는 것이 유리한 지, 안하는 것이 유리한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당시 언론은 주요 상가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동대문, 방산, 중앙시장 등 서울 시내 20여 도소매 시장 상인들은 8.3조치가 상거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이다. 어음 및 연수표 등으로의 구매는 상인들이 이를 꺼리고 있어 활발하지 못하다.” (서울경제신문 72년 8월 4일)
사채 신고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드러나자 박 대통령은 “신고된 사채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금출처조사를 하지 말라”고 국세청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자금원 노출을 우려해 사채신고를 꺼리는 행위를 막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국세청은 각 세무서에 관할 기업들의 사채신고를 독려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청와대 비서실장이 소공동세무서에 나가 직접 기업인들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태완선 부총리와 남덕우 재무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정책 수뇌부는 일제히 TV 대담프로에 출연, 사채동결조치의 당위성 홍보에 주력했다.
이 같은 전방위 홍보에 힘입어 시행 초기 저조했던 사채신고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 9일 전국 92개 세무서와 각 은행 창구에서 마감된 사채신고 규모는 예상보다 많은 3456억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규모로 전경련이 예상했던 1800억원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당시 지하경제가 얼마나 번창했는 지를 보여주는 물증이었다. 8.3조치로 3400억원을 넘는 거액사채가 일괄 동결되고 만기연장됨에 따라 그동안 줄을 잇던 대기업 부도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도 잦아들었다. 한 때 7.8% 까지 떨어졌던 경제성장률은 8.3조치를 계기로 73년 다시 14.1%로 뛰어올랐다. 특단의 초법 조치를 통해 화급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 정경유착…기업 모럴해저드의 시발점
8.3 사채동결조치는 기업 입장에서 더 바랄 나위없는 최상의 지원책이었다. 당장 사채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데다 원금상환 일정이 최장 8년 뒤로 유예됨에 따라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반대로 사채를 빌려준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조치였다. 이자수입이 대폭 줄어들고 향후 3년간은 원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됐다. 사채업자의 소득을 박탈해 기업에 이전해 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초법적 조치였다.
기업 자금난을 풀고 어려운 경제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극약처방이라고는 하지만 개인 사채권자의 무한대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형평의 문제로 남는다. 또 사채를 많이 쓴 기업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고, 사채를 덜 쓴 건실한 기업에게는 혜택이 덜 가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재계의 모럴해저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폐단은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미증유의 특혜를 줌으로써 박 정권과 재계간 정권유착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기업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이로써 경영합리화 보다는 정권과의 관계 유지에 더 신경을 쓰는 부작용을 낳았다.
위장사채로 인한 폐해도 낱낱이 드러났다. 신고사채의 3분의 1에 가까운 1137억원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한 기업주의 돈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사채 때문에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대기업들이 뒤로는 위장사채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는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위장사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노했다. 박 대통령은 1억원 이상 위장사채를 가진 대기업 등 10여개 기업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의 정책적 혜택도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지시는 그 후 소리없이 꾸준히 지켜져 해당 기업들은 거의 망하거나 존속하더라도 사세가 보잘 것 없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8.3조치로 기업들의 경영난이 해소되면서 수출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72년 하반기부터 수출이 증가세로 돌아서 73년 상반기중에는 전년동기 대비 91%라는 놀라운 신장세를 기록했다. 수출 증가에 힙입어 73년 상반기 경상수지도 전년동기 적자에서 1억2400만달러 흑자로 돌아서는 등 회복세를 나타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8.3조치는 국가권력이 개인간의 사적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수정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오점으로 기록된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경제논리에 의한 문제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아래 사채동결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 전경련은 “기획원의 안이한 현실인식과 대처로는 기업 연쇄도산과 실업증가가 불가피하다”며 사채동결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했다.
‘원론’이냐 ‘편법’이냐의 갈림길에서 결국 최고통치권자가 ‘편법’의 손을 들어줬고, 전무후무한 초법조치가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