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자본과 경영의 분리는 평소의 신념입니다. 모든 기업인이 국가시책에 호응해 주식 대중화에 적극 앞장설 것으로 기대합니다.”
74년 7월 9일 김성곤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언론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김 회장은 바로 전날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쌍용양회의 기업공개 계획을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대기업의 자발적인 기업공개가 흔치 않던 당시 상황에서 상공회의소 수장을 맡고 있는 김 회장의 공개 선언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 회장의 기업공개 선언은 결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후일 밝혀지지만 선언의 배후에는 정부의 강력한 압박과 회유가 있었다.
◆ “자기자본을 확충하라”..자금조달 구조개선 시급
8.3 사채동결조치를 단행하면서 정부는 기업공개 활성화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자기자본 확충 없이 대출이나 사채 등 타인자본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자금조달 관행을 바꾸지 않는 한 기업자금난 해소는 요원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기업들도 이 같은 정부 방침에 동참했다. 경제단체들은 8.3조치가 단행되자 곧바로 성명을 내고 “8.3조치로 받은 혜택은 생산성 제고, 기업공개, 원가절감 등을 통해 국민경제에 되돌려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작 경제가 위기국면에서 벗어나자 대기업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서로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기업공개를 미루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기업공개가 재무구조개선 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는 촉매제가 된다는 점을 들어 기업공개를 강력히 추진해 나갈 것임을 재천명했다. 8.3조치가 마무리되어 가던 72년 12월말 정부는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 73년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지지부진한 기업공개를 독려하기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이다.
◆ “공개 안하면 불이익 준다”
기업공개촉진법에 앞서 68년 제정된 자본시장육성법도 기업공개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담고 있다. 하지만 두 법은 기업공개를 이끌어내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자본시장육성법은 세제상의 혜택(incentive)을 주는 방법으로 공개를 유도하는 소극적 방식인데 반해 기업공개촉진법은 공개대상 법인을 심사, 선정한 후 공개를 명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세제 및 금융상의 불이익(disincentive)을 주는 적극적인 방식이었다. 목적은 같지만 해결 방식은 전혀 달랐다.
이처럼 법률적 강제성을 부여한 기업공개촉진법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공개는 지지부진했다. 정부가 아무리 권유해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기업은 많지 않았다.
74년 2월 27일 재무부는 기업공개촉진법에 명시된 기업공개명령권을 발동, 적격 공개업체 51개사를 지정, 발표했다. 정부로서는 법에 근거한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동원한 셈이었다.
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가 지정을 하던말던 우리는 공개에 관심없다”는 태도였다. 당시 국내 27개 재벌집단 가운데 산하 계열기업을 하나도 공개하지 않은 곳은 ▲선경 ▲쌍용산업 ▲화신산업 ▲대림산업 ▲대농 ▲신동아 ▲한국나일론 등 7개였다.
이들 재벌들은 기업공개촉진법에서 규정한 자본규모, 은행부채, 배당가능성 등 공개대상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었다. 굳이 기업을 공개해서 얻을 이익이 많지 않다는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 ”기업공개는 소유권 박탈”..부정적 인식 팽배
기업들이 이처럼 공개를 꺼린 배경에는 기업공개에 대한 당시 경영주들의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다.
당시 기업인들은 기업공개를 “소유권 박탈”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업을 공개할 경우 경영주와 무관한 사람들이 대거 주주로 등장, 기업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 없게 된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또 기업주들만 보아왔던 내부 경영지표를 외부에 공개해야 한다는 것도 당시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였다.
증시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 여건에서는 “공개로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부정적 시각이 팽배할 수 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정부의 공개유도 정책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70년대 증권전문기자로 현장을 누볐던 김영곤씨(전 서울경제신문 기자)의 회고.
“당시 대기업들은 기업을 공개할 경우 주식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었지요. 정 사장은 정부가 기업공개를 권유하자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어요. “내가 키운 알토란 같은 회사를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더 키워서 나중에 국민기업으로 환원할테니 기업공개 대상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것이었지요.”
현대라는 굴지의 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회장 조차 기업공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 대통령까지 나선 기업공개 유도
기업공개에 대한 재계의 호응이 부족하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사태로 까지 발전했다. 74년 5월 29일 박 대통령은 내각에 이른바 ‘5.29 특별지시’를 하달한다. 기업인들의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에 경종을 울리고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5.29 특별지시를 통해 ▲비공개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를 강화하고 ▲비공개 기업과 그 대주주에 대해서는 여신 및 납세 상황을 종합관리할 것 등을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비공개 대기업과 대주주에 대한 정부의 압박 강도를 높이라는 엄포였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재무부는 바로 다음날 ‘금융여신과 기업소유 집중에 대한 긴급대책’을 발표하는 등 후속조치에 착수했다. 정부는 우선 50억원 이상 여신을 받고 있는 계열집단을 A,B군으로 분류했다. 이 중 재무구조가 양호한 B군에 속한 기업들에 대해서는 공개적격성 및 증시 상황 등을 감안해 공개지정권을 발동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재무부 이재국, 한국의 금융정책)
정부는 이 같은 강제조치와 함께 대기업 소유주들에 대한 회유책도 병행했다. 김성곤 쌍용양회 회장에 대한 정부의 공개 권유가 이뤄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의 회고.
“기업공개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경제단체의 자발적 호응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던 김성곤 회장을 불러 쌍용그룹의 주력기업인 쌍용양회의 공개를 선언해달라고 요청했지요. 김 회장은 “그룹뿐 아니라 가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니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대답한 뒤 돌아갔습니다.”
재무부 장관의 기업공개 요청을 받은 김성곤 회장은 결국 7월 8일 기자회견을 열어 “5.29 특별지시에 적극 호응해 기업공개에 앞장서기로 했다”며 쌍용양회의 공개를 선언하게 된다. 당시 기업공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재계와 정부간 미묘한 줄다리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증시활황과 기업공개 러시
하지만 쌍용양회의 공개 선언 이후로도 대기업의 기업공개는 여전히 부진했다.
5.29 조치 이후 1년여 동안 48개 기업이 공개를 단행했지만 계열기업군 중 우량기업으로 인정된 주력업체의 공개는 거의 없었다. 정작 공개해야 할 알짜 대표기업들은 쏙 빠진 채 중소규모 업체들만 형식적으로 공개 대상에 올렸다.
정부는 주력기업의 공개를 촉구하기 위해 75년 8월 8일 ‘기업공개 보완시책’을 추가로 발표했다. 8.8 보완시책은 국민적 대기업의 기준을 정해 이에 해당되는 대기업들의 공개를 규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유망 대기업들이 먼저 공개에 나서라는 직접적 요구였다.
8.8 시책은 공개대상 대기업 기준으로 ▲계열기업군의 주력기업 ▲외형기준 100대 기업 ▲300만달러 이상 차관도입 기업 ▲수출실적순 100대 기업 ▲투자공사 실사 결과 적격법인 ▲중화학공업 기업 등 6가지를 제시했다. 대기업들의 경영자료를 매년 분석해 이 기준에 중복 적용되는 업체를 선발, 우선공개대상으로 지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보완시책 발표 2개월 후인 10월 6일 재무부는 제1차 공개대상법인 104개사를 발표함으로써 8.8시책의 구체적인 집행에 들어갔다.
기업공개촉진법 → 5.29 특별지시 → 8.8 보완시책 등 일련의 공개유도 정책이 이어지면서 기업인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공개기업 수도 늘어났다. 79년 들어 309개 대기업이 공개되고 전체 상장회사 수도 357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기업공개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85년 이후 계속된 증권시장의 장기 활황과 정부의 우량주식 공급확대 시책 등에 힘입어 87년부터 기업공개와 상장이 러시를 이뤘다. 88년 거래소 상장업체 수가 처음으로 500개를 넘어섰으며, 95년에는 700개를 돌파했다.
이후 99년 코스닥시장이 개설되면서 상장 및 등록기업을 합쳐 1000개사를 넘는 “상장기업 네자리수” 시대를 열었다.
◆ 실패로 끝난 ‘국민주’
80년대 후반들어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경영능률 향상과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재분배, 증권시장 투자저변 확대 등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국민주 보급에 나섰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공기업의 이익을 국민에게 환원하고, 향후 기대되는 기업 성장의 과실을 저소득층도 향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정부는 87년 12월 포철 한전 등 국민주 대상기업을 선정하고, 향후 5년간 5조원 상당의 주식을 매각하는 내용의 “국민주 보급계획”을 발표했다.
88년 4월 첫 단계로 포항제철 주식 가운데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3128만주가 주당 1만5000원(할인매입자 및 신탁가입자는 30% 할인된 1만500원)에 매각됐다. 300만명 이상이 포철주 매입에 나섰으며, 증권시장 시가총액은 단번에 8000억원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인 89년에는 한국전력공사 주식 1억2775만주가 국민주로 매각됐다. 청약자수가 600만명을 넘어섰고, 상장 당일 시가총액은 14조원이나 급증했다.
이후 94년 국민은행 주식 2100억원 어치가 공모됐고, 정부 소유 한국통신 주식도 매각돼 국민주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국민주가 장기투자 대신 단기차익을 노리고 보급 직후 곧바로 매매되어 버렸고, 해당 대기업의 지분은 다시 소수 대주주에게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식 분산소유’와 ‘소득 재분배’라는 거창한 목적 아래 도입된 국민주 제도는 도입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