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디바리우스 샴페인과 와인을
스트라디바리우스 음반을 들으며 마셔
귀와 입의 황홀이 일상을 눈부시게 해
[블록미디어=권은중 음식전문기자] 스타라디바리우스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하다. 17~18세기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의 현악기는 희소성 탓에 한 대에 수십억원은 물론이고 100억원을 호가한다. 실제로 2011년 경매에서 나온 ‘레이디 블런트’는 바이올린 경매 사상 최고가인 1590만 달러(약 200억원)에 낙찰됐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이상저온으로 극히 추웠던 17세기 유럽의 소빙하기를 겪어 밀도가 치밀한 목재로 만들었다. 거기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이탈리아 성인 스트라디바리를 라틴어 식으로 한 표기)가 장인정신을 발휘해 완벽한 대칭을 추구하는 기존의 바이올린과 달리 약간의 비대칭으로 독특하게 설계했다.
천혜의 자연 조건과 빛나는 장인 정신 덕분에 이 악기는 18세기 당시부터 신비의 소리를 내는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악기를 둘러싼 입소문과 희소성 등이 꼬리를 물면서 악기 가격을 끌어올렸고 3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악기의 대명사는 물론이고 장인정신으로 만든 초월적 아우라 혹은 최고의 품질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와인 이름으로도 자주 쓰인다. 와인과 바이올린은 닮은 것이 많다. 와인은 중세 수도승들이 토양에 따라 또 제조 방식이나 숙성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와인은 하늘과 땅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양조가들의 끝없는 탐구정신이 개입할 여지가 생겼다. 예수의 피로 불리는 신성한 와인에 신념 강한 이들의 땀이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인 와인 애호가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주제로 와인을 즐겨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와이너리인 바바의 스트라디바리오 바르베라 올드 빈티지를 구해준 보답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바바 와이너리는 악기를 모티브로 와인 라벨을 제작해왔다. 바르베라에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그려놓았다면 바르바레스코에는 첼로를, 모스카토에는 튜바를 그려놓았다. 화이트는 관악기를 레드에는 현악기를 그려놓았다. 나는 바바 바롤로 스카로네 올드빈은 마셔봤지만 바바 바르베라는 올드빈은 처음이었다(스카로네는 묵직하고 중후한 콘트라베이스를 그려놓았다).
바바 와이너리는 포도밭과 셀러에서 클래식 콘서트를 진행한다. 와인의 발효와 숙성이 진행되는 과정에 음악이 와인에 녹아들게 하려는 의도다. ‘사운즈 오브 와인(Sounds of Wine) 이론’을 토대로, 와인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여기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와이너리의 포도는 유기농으로 재배된다.
참치 토마토 파스타와 함께 즐긴 바바 바르베라 스트라디바리오 2010. 장기숙성 향이 곧 체리향으로 바뀌는 마법을 보여준다. (사진=권은중 기자)
스트라디바리우스 샴페인, 서양 배향 농밀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주제로 마시는 날 준비된 음식은 아주 단촐했다. 간단한 수프와 토마토 파스타가 전부였다. 디저트로는 토스카나의 딱딱한 피스타키오 과자인 칸투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음식이 간단할수록 와인과 사람에 대해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첫 메뉴인 충남 홍성 고구마로 만든 매콤한 수프와 함께 마신 와인은 프랑스 샴페인인 샤를 드 카자노브 스트라디바리우스 브뤼(Charles de Cazanove Stradivarius Brut) 2009였다. 이 샴페인은 병모양이 특이했는데 18세기 쓰였던 병 모양을 재현했다. 여기에 골드 컬러를 입혔다. 금색 컬러가 약간 거슬렸지만 카자노브의 최상급 샴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디자인됐다.
15년 가량이 지난 샴페인이어서 기포가 얼마나 있을까 약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예상외로 기포가 조밀하게 올라왔다. 시트러스 향과 곡물향이 올라왔고 서양배의 달콤함과 잘 만들어진 샴페인의 상징인 브리오슈 향이 느껴졌다. 이 샴페인은 피노뫼니에 53%에 샤르도네 47%로 블렌딩한다. 다른 샴페인 브렌드에서 많이 쓰는 피노 누아를 쓰지 않고 피노 뫼니에를 쓴 것은 바이올린을 연상시킬 수 있는 감미로운 아로마를 주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와인은 바바(Bava)의 바르베라인 스타라디바리오(Stradivario Barbera d’Asti DOCG Superiore) 2010이었다. 바르베라는 보라빛 자두색깔의 이탈리아 북부 토착 품종이다. 색깔처럼 베리향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농밀한 과실향과 함께 단단한 바디감을 가지고 있어 고기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바르베라와 가장 어울리는 것은 토마토 소스의 파스타. 그리고 트러플이다.
이날 함께 한 박권순 셰프가 준비한 것은 참치토마토 파스타였다. 기름기가 많지만 가다랑어가 생선인지라 과연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릴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바르베라의 체리, 베리 맛 그리고 담배향과 후추향이 참치통조림으로 만든 파스타와 너무 잘 어울렸다.
바르베라는 보통 5년 이상 숙성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포도 품종에 타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바의 바르베라는 10년 정도 숙성해도 거뜬하다. 18개월이나 오크통에서 숙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날 코르크를 딴 바르베라도 2010년 거라서 약간의 쿰쿰한 향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쿰쿰한 향은 달콤한 베리향으로 바뀌었고 토마토 소스 파스타와 조화를 보여줬다. 오히려 쿰쿰한 향이 음식이 가진 여러가지 향을 노련하게 끌어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음식과 와인과 함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해 녹음한 음반을 들었다. CD가 아니라 LP로 들었다. 오래된 와인에 대한 예의라고 기획자였던 지인이 말했다. LP를 물린 오디오는 미국 매킨토시 진공관에 영국 KEP 스피커에 물렸다. 황홀한 소리가 지인의 사무실에 쏟아졌다.
신비의 음을 낸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니, 현대 현악기에 견줘 평가는 많이 떨어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현대 음향공학으로 설계된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가 고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이제는 훨씬 소리가 더 좋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대 건축이 고전 건축보다 그저 튼튼하다고 현대 건축이 더 좋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듯이 악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소리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還元主義, 어떤 높은 단계의 개념을 더 낮은 단계의 요소로 분할해 정의하려는 인식론적 접근법)가 아닐까? 300년 전에 만들어진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가진 아우라를 음향공학으로 무장한 현대 악기가 과연 살릴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날 우리가 마신 스트라디바리우스 주제의 와인도 비슷할 것이다. 이 와인이 해당 와이너리는 물론 품종의 최상급 와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와인을 만든 사람들이 이 와인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병입된 지 10여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특별함은 캐비어나 송로버섯같은 미식이 아닌 고구마 수프나 토마토 파스타 같은 일상식이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상에 깃든 평범 속의 비범함을 알아채는 좋은 친구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말로 특별한 행운이 아닐까 싶었다. ‘아우라’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행운이 계속 쌓인다면 내 삶에도 가지런한 결쯤은 생기지 않을까하고 바라보는 괜찮은 순간이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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