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클레어 샤르도네, 쌈장과 먹는 삼치회와 어울려
오크 숙성으로 이스트·견과류 풍미 유혹적
모임 뒤 투표해보니, 만장일치로 샴페인 따돌려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겨울에는 생선이 맛있다. 바다의 수온이 차가워지면서 가을부터 바닷물고기들이 지방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체온이 낮아서 살의 지방이 우리 입에 들어가면 크림처럼 부드럽게 녹는다. 잘 만들어진 참치 뱃살 초밥이 한점에 1만원쯤하고 사람들이 큰 방어의 많은 살 가운데 뱃살을 찾는 이유다.
나는 회를 먹을 때 와인을 자주 들고 간다. 소주는 물론 청주보다 와인이 잘 어울린다. 나는 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은 샴페인과 리슬링을 꼽는다. 이 와인들이 간장과 고추냉이의 독특한 맛을 잘 씻어줘서 입안을 아주 개운하게 만든다. 로제 샴페인의 경우에는 지중해와 인접해 생선을 즐기는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유래된 로제와인에다 고전적 샴페인 제조방식으로 만들어진 섬세한 탄산 기포를 얹어서 회와는 최적이었다. 특히 김치, 고추, 마늘을 얹어서 쌈을 싸먹는 한국식 회에도 비교할 수 없는 궁합을 자랑한다.
하지만 전세계 화이트 와인 시장의 50% 이상을 잠식하고 있는 샤도네르는 생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샤도네르는 그저 그런 향과 맛을 가지고 있어 양조가의 철학이나 기술을 뽐내기 좋은 흰 도화지 같은 와인쯤으로 봐왔다. 거기다 샤르도네는 대부분 오크통에서 오래 숙성을 시키기 때문에 회와는 상극이다. 오크통에서 화이트 와인을 숙성시키면 열대과일, 바닐라 향이 나는데 이게 간장이나 된장과 매칭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 경험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말 전남 여수식 횟집에서 와인 모임을 가졌다. 당연히 나는 로제 샴페인을 가져갔다. 이 와인 모임은 모임이 끝나면 그날 사람들이 가져온 와인 가운데 최고 와인을 꼽는 투표를 한다. 아무래도 와인 경험이 많은 내가 번번이 1등을 해온 데다 로제 샴페인이면 1등을 할 것은 뻔하다고 예측했다(물론 1등을 한다고 회비를 깎아주는 건 아니다. 순전히 명예다).
이 여수식 횟집에서 주로 시켰던 회는 삼치회다. 삼치는 묵은 지 혹은 갓김치를 김과 봄동에 올려서 쌈장에 싸먹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의 하나다. 이렇게 회를 먹는 방식에는 보통의 화이트 와인은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갑오징어회를 먹었다. 갑오징어는 봄이 제철이지만 겨울 갑오징어 회도 참 근사하다. 부드러운 몸통살을 고추장에 찍어먹는다. 다들 내가 가져온 로제 스파클링을 감탄하며 마셨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인 배비치와도 함께 마셨는데 로제 샴페인의 상큼 발랄함에 견줄 수가 없었다. 승리는 당연해 보였다. 프랑스의 타투 쇼비뇽 블랑 와인도 등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와인이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하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다음 메뉴는 삼치회였다. 이 때 의외의 복병이 등장했다. 뉴질랜드의 리저브 샤르도네였다. 뉴질랜드 샤도네이는 사실 처음 마셔봤다. 뉴질랜드라면 남섬의 쇼비뇽 블랑과 리슬링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주 친숙한 와이너리인 생클레어 샤르도네였다. 생클레어는 뉴질랜드의 남섬 말보로우 지역에서 중저가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인데 나는 이곳의 쇼비뇽 블랑의 거의 모든 라인업은 물론이고 리슬링까지 마셔봤다. 하지만 샤르도네는 처음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오크통 숙성을 뜻하는 ‘리저브’라는 이름을 듣고 안심했다. ‘오크향이 된장과 김치와 충돌하리라. 와인을 가져온 사람이 이걸 놓치고 있다니’라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회에 무적인 로제 샴페인 보기 좋게 패해
그런데 내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10개월 동안 미국산 오크에 숙성했다는 이 와인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샤르도네 와인인 뫼르쏘의 향이 났다. 뫼르쏘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화이트 와인인데 가격이 10만~20만원쯤 한다. 생클레어 리저브 샤르도네는 회와 어울리지 않는 열대과일 냄새는 나지 않고 빵 냄새와 깨 향이 기분좋게 났다. 뫼르쏘의 특징이었다.
특히 이 와인은 추가로 시킨 굴전과는 아주 인상적인 매칭을 보여줬다. 굴전의 풍요로운 바다향과 말로보우 샤르도네의 성숙한 상큼함이 입안에서 기분좋은 여운감을 안겨주었다. 굴전과 와인을 마시면서 ‘이거 샴페인이 질 수도 있겠는데’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모임 다음날 정산과 함께 드디어 인기투표를 하게 됐다. 예상과 다르게 전날 참가한 6명이 모두 이 생클레어 리저브 샤르도네에 몰표를 던졌다. 내가 가져간 로제 샴페인은 적어도 한두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표도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이가 가져온 배비치 말보로우 쇼비뇽 블랑 역시 한표도 받지 못했다.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도 회와 잘 어울리는데 같은 지역 샤르도네에 완벽하게 밀렸다.
내가 가져온 샴페인이 한 표도 받지 못했지만 나는 섭섭하지는 않았다. 내 입에 꼭 맞는 멋진 화이트 와인을 조우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가 쌈장과 먹는 여수식 삼치회를 먹거나 간장 고추냉이와 함께 하는 일본식 회를 먹을 때 가져갈 와인 리스트에 생클레어 샤르도네 리저브를 추가했다. 물론 이 와인은 리저브 샤르도네인 만큼 회뿐 아니라 구운 생선이나 구운 닭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가져갈 자리가 아주 많은 와인인 셈이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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