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구아쇼 뫼르소, 독특한 유질감 선사해
12개월 숙성…아찔한 헤이즐넛·아몬드 향 일품
시트러스·꽃향도…유혹적 복합미
[블록미디어=권은중 전문기자] 나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늘 화이트를 고른다. 화이트 와인은 레드와인처럼 어렵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다. 하지만 아주 멋진 퍼포먼스를 낸다. 특히 가성비가 발군이다.
비유하자면 레드와인이 힘들게 관광 비자를 받아서 비싼 돈을 내고 비행기 표를 끊어야 갈 수 있는 저 먼 대륙의 광대한 자연이라면, 화이트 와인은 언제든 가고 싶으면 닿을 수 있는-그런데 늘 눈이 시리게 푸른-우리나라 동해안 같은 풍경이다. 비용은 보통 10분의 1이지만 당일 만족도는 대동소이하다.
내가 맛없는 레드 와인만 먹어봐서가 아니다. 나도 프랑스 보르도의 5대 샤토나 프랑스 부르고뉴의 유명 산지, 유명 양조가의 레드 와인을 마셔봤다. 심지어 보르도 현지도 다녀왔다. 물론 20세기 빈티지를 포함해서 연도별로 다양하게 마셔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 맛의 화려함쯤은 대충 아는 수준이다. 그런데 나는 레드 와인의 도도한 화려함이 아직까지 낯설다.
많은 화이트 가운데 아직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이트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뫼르소(Meursault)다. 가장 대중적인 화이트 품종인 샤르도네로 만드는 뫼르소는 프랑스의 원산지 통제 인증(AOC) 제도 분류의 최상위층인 그랑 퀴리가 없는 지역이다. 등급만 놓고 보면 다소 평범한 지역이다. 바로 이웃한 마을인 몽라셰(Monthrache)와 대조적이다. 몽라셰는 그랑퀴리가 포진해 있다.
뫼르소, 그랑퀴리 없어도 그랑퀴리 뺨쳐
하지만 잘 만들어진 뫼르소는 다른 지역의 그랑 퀴리 샤르도네 보다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랑 퀴리와 프리미에 퀴리가 즐비한 퓔리니 몽라쉐나 샤샤뉴 몽라셰에 견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뫼르소를 많이 찾아 마셨지만 뫼르소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유질감이나 복합미를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뫼르소 특유의 유질감이란 헤이즐넛같은 견과류향이 나 버트의 질감이 와인에서 느껴지는 경우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내가 마셨던 뫼르소의 가장 큰 특징은 시트러스와 꽃향기였다. 이웃한 몽라셰 마을에서 만든 샤르도네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다. 속칭 사람들이 말하는 뫼르소 유질감의 특장인 ‘깨볶는 냄새’를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와인 모임에서 와인 수입사를 운영하는 지인이 가져온 앙드레 구아쇼 뫼르소(André Goichot Meursault) 레 비레이에서 비로소 나는 깨볶는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깨볶는 향은 버터맛과 시트러스 향 그리고 엘더플라워처럼 작은 흰 꽃 향기와 겹쳐지면서 유혹적인 입체감을 부여했다. 이날 모임에는 돔 페리뇽(샴페인)과 라토 라피트 오 스미스(레드 와인) 같은 쟁쟁한 와인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 앙드레 구아쇼에 눈길을 뗼 수가 없었다.
메종 앙드레 구아쇼는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유일하게 남은 가족 경영 네고시앙(다른 생산자의 포도와 와인을 구매해서 자신의 명의로 와인을 유통시키는 상인이나 와이너리를 말함)이다. 그래서 다른 와이너리와 달리 도멘(직생산자)이 아니라 메종(네고시앙을 의미함)이 붙는다. 투자가의 입김 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앙드레 구아쇼는 1947년 설립됐다. 중세 수도원이 설립한 와이너리가 즐비한 와인의 명가 부르고뉴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힘든 신생 와이너리다. 하지만 이 와이너리 창립에는 독특한 스토리가 있다. 앙드레 구아쇼의 창립자는 2차세계대전 이후 빈 와인병을 모아서 판 돈으로 와인 배럴을 구매해 자신의 첫 와인제품을 세상에 내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후 앙드레 구아쇼는 창업자의 의지처럼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현재 부르고뉴 네고시앙 가운데 규모만으로 3위에 이른다. 뫼르소와 몽라셰는 물론이고 보졸레와 샤블리까지 생산하는 AOC 와인이 무려 120종에 달한다. 부르고뉴의 대부분 와인을 커버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난해 송년회 이후 앙드레 구아쇼 뫼르소에 반해서 지인이 경영하는 와인 수입사에까지 직접 2번이나 가서 와인을 받아 왔다. 연말 모임 이후 다른 송년회와 신년회에서 벌써 3번째 이 와인의 코르크를 땄는데 질리지가 않는다.
함께 마신 이들의 반응도 좋았다. 오크통에 12개월이나 숙성했지만 특유의 산미 덕에 회와 같은 안주는 물론이고 유질감이 강해 새우나 생선구이는 물론 닭튀김 같은 가벼운 육류와도 잘 어울렸다. 화이트 와인, 그리고 그중에 뫼르소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 와인을 계기로 더욱 공고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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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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