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대학동기 모임서 와인 픽업 중책 맡아
예산 맞춰 중식 매칭 와인 골라야
미 피노누아·뉴질랜드 샤도네르 반응 좋아
[블록미디어 권은중 기자] 능력은 부족하지만 자천 타천으로 대학 동기 와인 모임 부회장을 맡고 있다. 말이 부회장이지 사실 와인을 사서 운반해 가져가는 일종의 운반책쯤이다(머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정기모임은 1년에 4번인데 신년회 겸 첫모임이 지난 2월14일 있었다.
와인 모임을 하면 가장 머리가 아픈 게 콜키지 프리 식당을 찾는 것이다. 콜키지란 코르트+차지(비용)의 합성어로 고객이 식당에 와인을 가져갈 때 식당에 지불하는 비용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괜찮은 콜키지 프리인 식당이 드물다. 보통 병당 1~3만원 많으면 5원까지 콜키지 차지를 받는다. 문제는 이렇게 받으면서 병을 바꿀 때 잔도 바꿔주지 않는다. 좋은 식당은 차리를 낼 때마다 잔을 바꿔준다. 심지어 잔을 고를 수도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가 와인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매번 콜키지 프리 레스토랑을 수소문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행이 마당발인 친구의 도움으로 콜키지 프리를 해주겠다는 서울 마포의 근사한 중식당을 예약할 수 있었다.
우리 모임은 일반적인 모임처럼 각자가 마실 와인을 가져오는 BYOB(Bring your own bottle)로 운영되지 않는다. 총무가 회비를 걷어 그 회비를 부회장인 나에게 주면 내가 와인을 사서 모임에 가져가는 중앙집중식이다. 회원들이 친교를 위한 자리보다는 와인을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그런 공부를 했고 음식과 와인의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에 익숙하다보니 와인을 고르게 됐다. 나는 ‘기술 이사’쯤의 자리를 달라고 했더니 덜컥 부회장을 시킨 것이다.
중식과 와인, 내 원픽은 리슬링이지만…
기술 이사 입장에서 중식과 어울리는 와인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 리슬링이다. 포도의 북방한계선인 리슬링은 산도도 좋고 당도도 좋은 마법같은 와인이다. 그래서 한식이나 중식과 같은 스파이시한 음식과 궁합이 좋다. 하지만 이날 친구 가운데 각각 샤블리와 샴페인을 기탁한다고 해서 화이트 와인을 딱 한병만 골라야 했다.
샴페인은 중식과 딱이지만 샤블리는 섬세한 와인이라서 중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샤블리를 가져온다고? 와인을 잘 아는 친구가 그러니 ‘에잉’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됐다. 샤블리는 일식과 함께 할 때도 간장맛과 충돌하는 아주 조심조심해야 하는 와인이다. 그래서 나는 샴페인과 샤블리와 같은 품종인 샤르도네로 만들지만 향과 맛이 완전히 다른 뉴질랜드 생클레어 샤도네르를 골랐다. 뉴질랜드 남섬의 추운 기온에서 자라 강한 산도와 명징함을 가지고 있다. 내 생각에는 샴페인만큼이나 중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샤블리를 가져오는 친구를 골탕 먹이려는 짖꿏은 생각에서였다.
레드도 난관이었다. 레드는 와인 모임의 꽃이라서 신경이 더 갔다. 중국식 향신료에 어울리는 레드는 아무래도 당도나 향신료 향이 강해야 한다. 피노 누아, 진판델, 쉬라, 산지오 베제 템프라니요가 공식이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빠듯한 예산에 맞춰 레드 와인 3병을 골라야 했는데 피노 누아가 속을 썩였다.
피노 누아는 신대륙이나 구대륙이나 다 비싸다. 이 품종이 껍질이 얇고 병충해에도 약한데다 양조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거기다 다른 품종을 섞는 블렌딩도 잘 안한다. 피노 누아를 고르는 순간 다른 2병은 저렴한 와인으로 골라야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피노 누아는 먹을 만한 게 10만원가량이다. 와인 동아리 회원의 까다로운 입맛을 고려하면 아무거나 고를 수가 없다. 고민 끝에 내가 고른 것은 7만원짜리 미국 오레건의 피노 누아였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유명 네고시앙인 죠셉 드루엥이 미국에 설립한 와이너리에서 만든 피노 누아다. 세일 때가 아니어서 가격이 좀 있었지만 회원들의 입맛을 위해 골랐다. 피노누아가 정해진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프랑스 쉬라와 스페인 템프라니요를 골랐다. 향신료 맛이 강한 구대륙 남부의 와인이었다. 중식에 많이 쓰는 붉은 고추와 향채에 어울린다. 호주 쉬라즈도 고민했지만 피노 누아를 신대륙 와인으로 골라 나머지는 구대륙으로 골랐다(기술이사가 신경써야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드디어 모임이 시작됐다. 우리는 순서대로 양장피(냉채), 팔보채(해산물), 유린기(육류 가운데 조류) 육즙 군만두, 탕수육(육류2)을 시켰다. 내 입맛에는 불맛을 입힌 이 집의 팔보채가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다른 레스토랑보다 매콤했다. 샤블리와는 안 맞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샴페인과 뉴질랜드 샤르도네는 매운 맛까지 싹 씻어주었다. 대조형 페어링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미국 오레건의 피노누아도 유린기, 탕수육과 좋은 조화를 보였다. 하지만 내 입맛에 더 좋은 조화를 보인건 스페인의 템프라니요로 빚은 란 그랑 리제르바였다. 템프라니요 포도가 가진 주 특성인 후추와 가죽 맛이 중식의 향신료와 조화로웠기 때문이다. 뼈대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프랑스 북부 론의 이기갈 쉬라는 란에 밀렸다.
맛의 레이어보다 진한 향과 맛 좀더 선호
우리는 모임 마지막에 이날 마신 와인에 대한 투표를 한다. 일종의 품평이다. 화이트는 당연히 샴페인이 1등을 했다. 하지만 뉴질랜드 샤도네이도 만만치 않게 표가 나왔다. 레드는 역시 내가 고심해 고른 오레건 피노 누아였다. 미국 피노 누아의 매력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음으로 많이 나온 것은 스페인 템프라니요였다. 피노 누아가 없었다면 아마 란이 1등을 했을 것이다. 프랑스 쉬라는 1표에 그쳤다. 란이 맛있기는 하지만 입체적인 레이어가 없어서 프랑스 쉬라에 표가 더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회원들은 단호했다. 역시 강렬한 임팩트가 와인을 픽업하는 주요한 동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런 멤버들간의 품평은 다음에 각자가 와인 모임을 할 때 중요한 판단 근거로 쓰일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결과를 데이터화해서 다른 모임은 물론 와인 강연을 할 때 참고한다. 4월쯤 열릴 동기 모임에는 좀 더 근사한 와인을 골라서 나의 친구들에게 맛과 향을 넘어선 인식의 쇼크를 주고 싶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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