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이탈리아 억만장자 잔카를로 데바시니와 미국의 실리콘밸리 사업가 제러미 얼레어가 스테이블코인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암호화폐의 주류화를 선언하면서 두 사람의 대결은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의 문제가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의 갈등과 암호화폐 산업의 미래를 둘러싼 긴장감을 집중 조명했다.
암호화폐 제왕, 테더의 데바시니 vs 슈트 입은 혁명가, 서클의 얼레어
스위스 루가노의 알프스 마을에 사는 억만장자 지안카를로 데바시니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호숫가의 수수한 아파트에 살며, 검은색 후드 티를 입고 자갈길을 거니는 그는 현재 자신의 사업을 파괴하려 한다고 믿는 미국 경쟁사 ‘서클’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데바시니는 디지털 달러 USDT를 발행하는 회사인 테더의 주요 소유주 중 한 명이다. 그가 이끄는 테더(Tether)는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의 80%를 차지하는 디지털 달러를 발행하고 있다. 지난해 테더의 수익은 130억 달러, 이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두 배다. 비평가들은 테더의 불투명한 운영방식과 자금 세탁 가능성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나 데바시니는 일방적 비난에 불쾌해하며, “테더가 살아있는 한 서클은 이길 수 없다”고 독설을 내뱉는다.
그의 제국을 무너뜨리려고 나선 사람은 서클의 창립자 제레미 알레어다 . 서클은 USD 코인 또는 USDC라고 불리는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 얼레어는 전통 금융 시스템과 규제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USDC를 디지털 달러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다보스나 월가, 의회 어디에서나 편안한 정장이 잘 어울리는 그는 세계 각국을 돌며 규제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간단하다. “USDC가 디지털 달러의 표준이 되는 것.” 그리고 서클은 규제를 통해 테더를 몰아내려고 한다.
3조 달러를 둘러싼 싸움
이들의 싸움은 3조 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시장의 미래를 좌우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암호화폐를 전략적 자산으로 인정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얼레어는 미국과 유럽에서 테더 토큰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고, 유럽연합(EU)에서는 이미 관련 법이 시행됐다. 그는 테더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회에서 정기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반면, 데바시니는 공식 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테더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그는 최근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함도, 직장도 없다’는 명함을 돌리지만, 실제로는 테더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데바시니는 대중의 시선을 피하며 상무부 장관 하워드 루트닉과 같은 동맹을 통해 테더를 지키려 하고 있다.
다른 출발, 다른 길
데바시니 “금융시스템을 뒤집어 엎겠다”
이탈리아인 데바시니는 밀라노에서 성형외과 의사였다. 하지만 칼 대신 전자제품을 들고 홍콩으로 떠나더니, 이젠 암호화폐 제국을 건설한 억만장자가 됐다. 물론 그의 과거가 완전히 깨끗했던 건 아니다. 1995년, 불법 소프트웨어 복제 사건에 연루되어 이탈리아 검찰에게 걸렸고, 마이크로소프트에 합의금을 내고서야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러다 약 10년 전, 데바시니는 암호화폐라는 보물 지도를 발견했다. 당시 대부분의 암호화폐 회사들은 디지털 화폐를 실제 은행 시스템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테더(Tether)다. 2014년,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설립된 테더는 달러와 1대1로 고정된 스테이블코인 USDT를 내세워 암호화폐 시장을 평정해 나갔다. 데바시니의 꿈은 간단했다. 전통 금융 시스템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
얼레어 “인터넷에 친화적인 금융시스템을 만들자”
제레미 얼레어의 사명은 데바시니와는 완전히 달랐다. 현재 53세인 그는 애니메이션 기업 매크로미디어(Macromedia)에서 최고 기술 책임자(CTO)로 활약했던 실리콘밸리의 베테랑이다. 그는 테더가 등장하기 1년 전인 2013년, 보스턴에서 서클(Circle)을 설립했다. 그의 목표는 인터넷 시대에 맞는 깔끔한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암호화폐 커뮤니티가 ‘규제? 그딴 건 필요 없어!’라는 입장이었던 반면, 얼레어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이런 전략이 암호화폐 세계에서는 어긋난 행보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블랙록을 비롯한 기존 금융과의 접점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규제 기관과 손을 잡고 서클을 키워나갔고 덕분에 워싱턴의 고위 정치인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 누구보다도 능숙하다는 평을 받는다.
재무제표: 투명 vs 간편
서로 다른 생각은 기업 운영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서클(Circle)은 규제에 어울리는 투명성을 무기로 삼았다. 2021년에는 감사된 재무제표를 공개하고, 회계 회사 딜로이트(Deloitte)를 고용해 USDC의 준비금 현황을 월별로 세세히 밝혔다. 준비금 대부분은 국채와 현금, 일부 단기 국채 대출로 구성됐다. 덕분에 서클은 “우린 투명하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반면 테더(Tether)의 재무제표는 훨씬 간단하다. 뉴욕 주 규제 기관의 강제에 따라 최소한의 정보만 공개됐다. 테더의 준비금은 비트코인, 상업 대출, 금, 그리고 그 외 기타 다양한 자산으로 구성돼 있다고 밝힌 것. 데바시니는 서클과의 비교가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USDC를 “똥코인(Shitcoin)”이라고 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또한 감사원들이 테더에 대한 편견(루머)때문에 제대로 평가해주지도 않는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2022년, 돈을 쓸어 담은 테더와 서클
수년간 평범한 수익률에 머물렀던 테더(Tether)와 서클(Circle)은 2022년에 들어서며 돈을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올리자 테더의 재무부 보유 자산은 연간 수천만 달러에서 분기당 수억 달러로 급증했다. 데바시니는 이 횡재를 자신을 위해 쓰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낡은 운동복을 입고 “FOOL”이라고 적힌 모자를 쓴 채로 어깨에 메모리 드라이브와 열쇠를 주렁주렁 달고 회의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에게 “오늘 테더가 얼마나 벌었는지 알아?”라며 자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많아지면 적도 많아지는 법. 데바시니는 자신의 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은행 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확신하며 불안해 했다. 2022년 12월, 바하마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백악관이 언제든 테더를 폐쇄할 수 있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고 동료들은 전한다.
고품질로의 도피 VS 안전으로의 도피
서클의 제레미 얼레어는 전통 금융권과의 관계를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2022년 말까지 서클의 준비금은 대부분 세계 최대 보관 은행인 뉴욕 멜론은행(Bank of New York Mellon)에 맡겨졌다. 일부 현금은 다른 규제 금융 기관에 분산 보관됐으며, 블랙록(BlackRock)이 재무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있었다.
조직 운영도 완전히 달랐다. 테더(Tether)는 잔카를로 데바시니와 이탈리아 프로그래머 파올로 아르도이노가 이끄는 소수 정예 팀이 운영하고 있다. 반면, 서클(Circle)은 수백 명의 직원과 전직 기업 임원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다. 이런 성장을 발판 삼아 서클의 제레미 얼레어는 한 때 USDC 성장세가 가팔라지고 있다며 트레이더들이 테더를 버리고 “고품질로의 도피”를 선택하고 있다고 트윗하기도 했다.
고품질의 추락? 여유 찾은 테더
하지만 2023년 3월, 실리콘밸리 은행(SVB)이 붕괴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서클은 30억 달러가 넘는 현금 보유고를 날리고 말았다. 겁에 질린 트레이더들은 앞다퉈 USDC를 매도했고, 가격은 1달러에서 87센트까지 떨어졌다. USDC는 머니마켓 펀드처럼 1달러에서 변동하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기에 이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테더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테더는 “우린 SVB에 노출되지 않았다”며 서클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트레이더들은 다시 테더로 몰려들었고, 아르도이노는 트위터에서 “안전으로의 도피”라며 반격했다. USDC는 결국 규제 기관의 개입으로 페그를 회복했지만, 그 사이 약 200억 달러가 빠져나갔다.
서클의 반격: 규제의 칼을 들다
2023년 6월, 서클(Circle)의 제레미 얼레어는 반격에 나섰다. 그는 의회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연방준비제도에 현금을 보유하도록 하는 엄격한 법안을 청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발행된 테더(Tether)의 디지털 달러를 금지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얼레어는 “미국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스테이블코인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테더를 맹비난했다. 심지어 일본, 싱가포르, 유럽연합(EU), 브라질 등 전 세계 정부에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촉구하며, 현지 은행들과 계약을 맺으라고 조언했다. 얼레어의 규제 전쟁이 본격화된 순간이었다.
규제와 반(反) 규제의 싸움
미 재무부도 가세했다. 해외에서 발행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 요구는 승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 커스틴 질리브랜드와 와이오밍주 공화당 상원의원 신시아 루미스는 규제되지 않은 스테이블코인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루미스는 대놓고 “난 테더보단 서클을 선택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서클은 또 한 번 웃었다. EU 전역에서 운영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 라이선스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최소 30%의 준비금을 현지 은행에 현금으로 보유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테더는 SVB(실리콘밸리 은행)의 붕괴를 언급하며 “이 조건은 더 위험하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서클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코인베이스(Coinbase)를 비롯한 거래소들이 테더를 상장 폐지해버린 것이다.
바이낸스의 배신? 서클의 승리
서클의 가장 큰 승리는 12월에 찾아왔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Binance)가 USDC의 채택을 확대하기로 협력하면서다. 한때 자유분방하게 테더 거래를 중개하던 바이낸스가 서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바이낸스는 2023년 후반, 미국 금융 범죄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인정한 후 방향을 바꿨다. 테더에게는 뼈아픈 배신이었다. 결국, 테더는 불투명한 자산 구성과 규제 회피 전략으로 버티고 있고, 서클은 투명성과 규제 순응을 무기로 파상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규제와 반규제의 칼날 사이에서 누가 최후에 웃을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테더의 숨은 패: 루트닉과의 은밀한 거래
잔카를로 데바시니는 소매에 숨겨 둔 에이스가 있었다. 상무부 장관 하워드 루트닉과 그의 회사 캔터 피츠제럴드(Cantor Fitzgerald)였다. 루트닉은 테더에 불리한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루트닉은 “범죄자들이 애플 폰을 쓴다고 해서 애플을 비난할 순 없다”며 테더의 불투명성에 대한 비판을 일축했다. 트럼프 행정부도 가세했다. 트럼프는는 “전 세계적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홍보하기 위한 행정 명령을 내렸다. 흥미로운 건 그 후였다. 루트닉이 캔터에서 물러난 뒤, 테더에서 일하던 그의 아들 브랜든 루트닉이 켄터 회장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테더의 숨은 패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승자는 누구인가
최근 테더는 일부 거래소에서 상장 폐지된 이후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반면, 서클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로 본사를 이전하며 USDC의 시가총액을 회복하고 있다. 규제의 칼날은 주로 테더를 겨냥하고 있지만, 데바시니의 숨은 패가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결국 이 싸움은 규제를 등에 업은 서클의 상승세가 계속될지, 아니면 테더가 반격에 성공할지에 달려 있다. 규제와 반규제의 칼날 사이에서 누가 최후에 웃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패권을 둘러싼 이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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