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에 당분 넣지 않는 제로 도사쥬
포도가 이상적으로 완숙했단 증거
까델보스코 제로 도사쥬, 차고 맑아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죽기 전에 한병의 와인을 마신다면 뭘 마시고 싶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내 대답은 “샴페인”이다. 안주는 참치 뱃살을 올린 초밥이나 오징어 순대를 놓고 먹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샴페인 마니아다. 와인 모임에도 늘 샴페인을 가져간다. 또 혼자서도, 혹은 아침에도 샴페인을 가끔 마신다. 아침에 마셔도, 혼자 마셔도 술꾼 같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와인이 샴페인이라 생각한다. 샤도네르의 크리미함에, 피노 누아의 섬세한 강건함이 펼쳐보이는 맛은 독특하다 못해 신비롭다.
왜 샴페인엔 설탕을 넣을까?
이렇게 내가 샴페인을 좋아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샴페인이 있다. 바로 도사쥬 제로 샴페인이다. 도사쥬(dosage) 프랑스어로 ‘용량 결정’, ‘배합’이라는 뜻의 명사다. 샴페인에 당분을 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당분은 사탕수수로 만든 리큐르를 사용한다. 가공 전의 설탕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샴페인에 설탕이라니? 샴페인에 사탕수수 즙을 넣는 것을 납득하려면 샴페인 제조 전반을 이해해야 한다.
샴페인은 큰 탱크에서 숙성해 병에 넣는 게 아니라 한병씩 와인을 효모와 함께 병입해 2년 이상에 걸쳐 기포를 만든다. 이를 클래식 메서드라고 한다. 이탈리아 스푸만테나 스페인 카바도 이런 전통 방식으로 만들면 고급 스파클링으로 분류된다. 인간 노동력이라는 수고로움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반면 큰 통에서 거품을 만들어 출고 전 병입하는 방식을 샤르망 방식이라고 하는데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이탈리아 모스카토가 대표적이다.
샴페인은 효모를 개별 병에 주입했기 때문에 병마다 허연 효모찌꺼기가 생긴다. 샴페인은 비스듬히 세워 놓은 병을 하나하나씩 사람 손으로 일일이 돌려 수년간 이 효모 찌꺼기 병 입구로 모은다. 2년 이상의 긴 숙성 기간이 지나면 병 입구 부분을 얼려서 이 찌꺼기를 제거한다. 그리고 코르크로 병을 막아 출고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효모 찌꺼기뿐 아니라 와인도 빠져나간다. 빠져나간 만큼의 와인을 병에 다시 주입하는데 이때 당분도 추가한다. 이 과정이 도사쥬다. 이때 첨가하는 당분에 의해서 샴페인 당도가 결정된다. 리터당 12g 이하가 가장 드라이한 브뤼(brut)다. 12g을 초과하면 섹(sec)이라고 하고 더 높은 당도를 가진 것을 드미섹(demi-sec)이라고 한다. 단 샴페인은 주로 디저트류와 즐긴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는 샴페인 메이커들은 첨가하는 당분의 양을 적게 한다. 코로나19이후 소비자들이 건강에 관심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만 첨가하고 당분을 미량만 첨가려는 경향이 생겼다. 제로 콜라처럼 제로 도사쥬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처럼 샴페인을 오랫동안 즐겨온 사람에게 제로 도사쥬 샴페인은 낯설다. 실제로 샴페인 메이커들은 도사쥬에 쓰는 당분량이 많지 않다. 엑스트라 브뤼의 경우에는 리터당 2~3g쯤이다. 정말 적은 양이다. 그런데 이 적은 양에도 사람의 혀가 반응을 한다는 게 문제다. 당분이 샴페인의 맛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제로 도사쥬를 잘 즐기지 않는다. ‘트렌드라니까 있으면 마셔본다’ 정도의 다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브뤼만해도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아코르타, 제로 도사쥬 편견 깨
그런데 내 생각을 깨는 계기가 있었는데 샴페인이 아니었다. 프란치아코르타(Franciacorta)라는 이탈리아의 스푸만테(이탈리아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프란치아코르타는 ‘이탈리아의 샴페인’으로 불릴 만큼 엄선된 포도를 이용해 개별 병입하고 오래 숙성하는 전통방식으로 만든다. 밀라노가 주도인 롬바르디아주의 대표적 스푸만테다. 프란치아코르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가르다(Garda) 호수 서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큰 호수를 끼고 있고 알프스 아래 있는 이 지역은 풍광이 수려할 뿐 아니라 용천수가 많아 농업에도 적합하다.
내가 제로 도사쥬에 대한 생각을 바꾼 계기는 지난 12일 서울 나라셀라도운홀에서 열린 ‘미트 더 메이커(Meet the Maker)’라는 행사였다. 이날 초정된 연사는 카델보스코(Ca’del Bosco) 아시아 담당 매니저인 에리카 갈론이었다. 그녀는 “제로 도사쥬는 원재료인 와인이 이상적으로 완숙됐을 때만 가능하다”며 “제로 도사쥬 프란치아코르타는 와인의 떼루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스파클링 와인을 맛과 효능으로만 접근해 왔다. 그런 나에게 처음 듣는 제로 도사쥬의 의미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화두였다.
까델보스코는 프란치아코르타로 와인 애호가에게 널리 알려진 와이너리다. 까델보스코는 이탈리아어로 숲속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와인평가 기관인 『감베로 로쏘』의 최고평점인 ‘3 비케리(비케리는 잔이라는 뜻이다)’를 이탈리아에서 바르바레스코 와인으로 유명한 가야와 함께 가장 많이 받은 와이너리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통계 자료를 보면, 이탈리아에 3만7000개의 와이너리(2021년 기준)가 있다. 여기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와이너리라는 뜻이다. ‘페라리’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내가 가장 자주 즐겨온 스파클링 와인이기도 하다.
까델보스코, 가르다 호수처럼 맑고 차
가르다 호수는 이탈리아의 유명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사시사철, 여름철 부산 해운대 해변가처럼 사람이 몰린다. 가르다 호수는 그런 인파를 뚫고 갈만한 풍경이다. 무엇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넓은 호수라는 규모 덕에 호수가 마치 바다같이 넓다. 하지만 수면은 맑고 잔잔하다. 호수 북쪽에는 눈 덮인 알프스가 펼쳐져 있다. 가르다 호수는 만년설의 웅장함과 잔잔한 호수의 고요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신비한 곳이다.
이날 나는 행사장에서 까델보스코의 프란치아코르타 4종류를 마셨다. 맑고 차고 깨끗했다. 호수와 눈덮인 산이 떠올랐다. 이 중에 제로 도사쥬 프란치아코르타가 기억에 남는다. 2019년 빈티지였다. 병에서 무려 48개월을 숙성했다. 샴페인을 뺨치는 숙성기간이다. 알코올 도수는 12.5도였다.
까델보스코 제로 도사쥬 2019는 단아했다. 가슴에 품은 화두가 없었다면 ‘조금 밋밋하다’라고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피어나는 정밀한 거품 속에서 청사과와 시트러스의 향으로 시작해서 열대과일 헤이즐넛 향으로 마무리됐다. 일반적인 샴페인에 견줘 자극적이지 않고 균형감이 좋았다.
제로 도자쥬는 일반적인 브뤼 스파클링에 견줘 분명 쨍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음새없이 이어지는 균형감이 쨍함과 다른 원숙함을 보여준다. 이 원숙함은 우아하고 균형감이 있다. 마치 알프스의 눈덮인 산을 수면에 담고 있는 가르다 호수처럼 말이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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