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롤로 VS 브루넬로 몬탈치노의 자존심 대결
지아코모 콘테르노, 10년 기다리면 활짝 필듯
비온디 산티 로쏘, 활기차나 복합미 아쉬워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와인 모임을 하면, 사람들이 주로 5만~10만원대 와인을 많이 가져온다. 서로서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여유가 있거나 맛을 중시하는 친구들은 10~20만원대 와인을 들고 온다. 이런 와인이 꼭 그날의 가장 기억할만한 와인까지는 아니지만 꺼내는 순간 주목을 끈다. 그런데 50만원짜리 와인이라면. 순간 침묵이 흐른다. 지갑이 빠듯한 나는 이 침묵을 매우 사랑한다.
얼마 전 이런 침묵을 경험했다. 주인공은 지아코모 콘테르노 프란치아 바롤로(Giacomo Conterno Francia Barolo)였다. ‘바롤로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와인이다. 설립자 이름이기도 한 지아코모 콘테르노는 내가 가장 가고 싶은 와이너리다. 프란시아는 포도밭이름이다. 한 선배가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를 하고 이탈리아 현지에서 400유로쯤 주고 이 와인을 사왔다. 이런 귀한 와인을 후배들을 위해 헌정한 것이다.
바롤로의 왕 중 왕, 자코모 콘테르노
이 와인을 마시려면 ‘왕의 와인’을 불리는 바롤로 와인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바롤로는 1970년대 젊은 양조자와 나이가 든 양조자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곳이다. 핵심은 프랑스의 양조학을 적절히 받아들이자는 것. 이들이 특히 문제 삼았던 것은 ‘꼰대들이 쓰는’ 슬로베니아 오크통이었다. 전통적인 방법인 1만리터가 넘는 이 낡은 슬로베니아 오크에 수년간 숙성하지 말자는 게 이야기였다. 대신 새 프랑스 오크통을 써서 와인에 가볍게 터치를 하자고 주장했다.
젊은 양조자 엘리오 알타레(Elio Altare0가 선두에 섰다. 그는 먼저 자기 아버지가 쓰던 슬로베니아 오크통을 전기톱을 박살냈던 과격파였다. 결과는 그는 가문에서 파문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 많은 바롤로 양조자들이 프렌치 오크를 쓴다. 혁신에는 이런 통증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부터 비판한 혁명가였던 셈이다.
그 반대편에 서있던 와이너리도 있다. 그 중심이 지아코모 콘테르노였다. 아직도 슬로베니아 오크에 최소 48개월을 숙성한다. 재미있는 점은 지아코모가 이 오크를 쓰던 1920년대에는 이게 혁신이었다. 그처럼 오래 바롤로를 숙성하는 양조업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바롤로 와인 최초로 개별 병입해 와인을 팔았던 주인공이다. 결과적으로 지아코모 콘테르노의 와인은 ‘왕의 와인’으로 불리던 바롤로 와인 가운데서도 왕으로 불렸다. 왕 중 왕인 셈이다.
지금은 모던 바롤로가 많이 생산돼 오히려 지아코모 콘테르노처럼 전통적인 바롤로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 나는 둘 다 다 좋아한다. 둘 다 맛이 완전히 다르다. 모던 바롤로는 발랄하며 향기롭다. 전통 바롤로는 묵직하다. 당연해 두개를 섞어놓은 와이너리도 있다. 프렌치 오크와 슬로바니아 대형 오크를 다 쓰는 꾀돌이들이다. 다밀라노(DaMilano) 같은 바롤로 생산 와이너리인데 이 역시 맛있다. 나는 다밀라노 와인을 한국에서 보면 무조건 산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이 와이너리와 와인밭을 여러번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조가의 노력이 와인 마니아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다.
비온디 산티(Biondi Santi)도 지아코모 콘테르노와 비슷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비욘디 산티는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를 완전히 다시 쓴 와이너리다. 그런데 그게 무려 19세기말이다. 당시 토스카나 와인은 싸구려로 취급받을 만큼 엉성한 양조기술을 썼다. 심지어 레드 와인을 만드는데 산도를 유지하려고 화이트 품종을 넣기도 했다. 그런데 비온디 산티는 산지오베제의 한 종류인 브루넬로 100%에 오크통 장기숙성을 고집했다. 100년을 내다본 셈이다. 물론 싸구려 와인을 만들던 와이너리들은 비온디 산티를 보고 혀를 찼다. “팔아먹을 데도 없는데 이상한 고집을 핀다”며.
비온디 산티의 이런 노력은 자신의 와인은 물론이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몬탈치노는 토스카나 남부의 한 마을 이름이고 브루넬로는 품종 이름이다. 약자로 BdM으로 불린다)를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주목받는 이탈리아 와인 생산지로 만들었다. 특히 196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이탈리아 대통령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만찬에 비온디 산티의 BdM이 올라가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비온디 산티의 최고 라인인 비온디 산티 BdM 리제르바는 오크통에서 36개월 숙성한다. 가격은 한화로 30~40만원대다. 이 와인은 여러 와인 평가 기관에서 ’20세기 최고 와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비욘디 산티, 이탈리아 와인 역사 다시 써
나는 리제르바보다 숙성기간이 짧은 로쏘 디 몬탈치노를 구매한다. 비용 측면도 있지만 로쏘 디 몬탈치노가 더 발랄해 마시기 편하기 때문이다. 리제르바는 50년 정도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타닌이 단단하다. 그래서 마시려면 최소 8시간은 코르크를 열고 브리딩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적어도 빈티자가 10~20년 전 게 먹을만 하다는 이야기다. 와인셀러나 와인 수집가가 아니라면 참 즐기기 힘든 와인인 셈이다. 반면 로쏘 디 몬탈치노는 12개월 숙성을 한다. 그래서 최근 빈티지도 좀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날 선배의 지오코모 콘테르노 바롤로에 급을 맞추기 위해 모임에 내가 들고간 것은 비온디 산티의 로쏘 디 몬탈치노였다. 지아코모 콘테르노 프란치아는 2018년, 비온디 산티 로쏘 디 몬탈치노는 2019였다. 둘다 빈티지가 약간 어린 게 맘에 걸렸다.
이날 메뉴는 양고기 스테이크였다. 두 레드 와인에 어울리는 메뉴였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나온 양고기 요리는 훌륭했다. 미디엄 레어로 알맞게 구운 양고기에 페스토를 멋지게 발랐다. 비주얼도 완벽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와인이 퍼포먼스를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지아코모 콘테르노 2018은 디캔팅을 했지만 그 복합적인 향과 맛을 느낄만큼 열리지 않았다. 내가 이탈리아 현지에서 마셨던 바롤로의 특징-실키한 부드러운 베리 맛 뒤에 느껴지는 강력한 버섯, 담배, 가죽, 흙향-이 피어나지 않았다. 많이 기대해서인지 아쉬움이 컸다. 아마 2030년쯤에 열었다면 내가 알고 있는 그런 맛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병 숙성의 기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48개월이나 오크통에 있던 와인이 아름다움을 뽑아내기에는 2~3년은 짧은 시간이었다.
반면, 비온디 산티 로쏘 디 몬탈치노는 2019년 빈티지였지만 상대적으로 퍼포몬스를 보였다. 체리향 오렌지향같은 여러 가지 향이 느껴졌다. 타닌도 지아코모 콘테르노에 견줘 상대적으로 적어 좀더 상큼하고 발랄했다. 그래서 양고기와는 좀더 어울렸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맛을 감안한다면, 가벼웠다. 복합적인 맛도 아쉬웠다.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 느낌인 지아코모 콘테르노와 비교가 되다보니 출발부터 약간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레드 와인은 어떤 와인을 마셔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잘 보인다. 2025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레드 와인 대부분은 2017년 이후 와인이다. 숙성이 잘된 레드와인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결론은 별도의 셀러나 와인 창고가 있는 사람만이 와인을 더 잘 즐길 수 있다. 이런 핸디캡 때문에 레드 와인을 즐기려면 친구를 잘 만나거나 와인뿐 아니라 셀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와인 푸어(와인과 관련 제품을 구매하느라 가난해진 사람)로 살아야 한다. 괴팍해 있던 친구들도 소원하게 만드는 내가 ‘와인푸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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