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필러스 김재원] 다음 세대의 블록체인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밈(meme)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Key Takeaways
- 문화 체인(Culture Chain)은 특정 팬덤 및 문화 산업을 중심으로 설계된 버티컬 블록체인(vertical blockchain)이다. 열성적이고 결속력 있는 팬덤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보다 뾰족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 크립토 시장에서 강력한 해자 중 하나는 프로젝트를 향한 커뮤니티의 믿음(belief)이다. 문화 체인은 커뮤니티의 정체성과 취향을 아키텍처 설계에 녹여냄으로써,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내고 경제적 활동으로 연결시킨다.
- 수많은 범용 블록체인들이 여전히 사용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문화 체인은 이미 경제적으로 활발한 팬덤을 기반으로 출발한다. BTS부터 아즈키(Azuki)에 이르기까지, 이들 커뮤니티는 이미 크립토 네이티브한 행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를 수용할 적절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 이러한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다. Story, Animecoin, Abstract와 같은 프로젝트는 기술 스택, 거버넌스 구조, 토크노믹스까지 모두 특정 소비자층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고 있다.
- 다음 사이클의 승자는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정의되지 않을 것이다. 문화가 부가 요소가 아닌 핵심 제품이 되는 블록체인이 시장의 중심에 설 것이다.
혁신적인 합의 알고리즘도, 높은 TPS도 아닌 문화 때문에 특정 블록체인이 주목받는 시대를 상상해보자. 이 체인에서는 낮은 가스비나 기술적 이점 때문이 아니라, 같은 밈을 공유하고, 같은 유행어로 소통하며,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 다소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크립토의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사례들은 기술보다 문화가 더 강력한 성장 동인임을 이미 여러 차례 증명해왔다.
도지는 농담에서 시작된 밈이었지만, 기술적 혁신 없이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산으로 성장했다. 비트코인의 초기 확산 역시 코드보다는 사이버펑크적 이념이 중심이었다. 이더리움의 수많은 초기 사용자들은 “기술 때문에 시작했지만, 커뮤니티 때문에 남았다“고 말한다. ETHGlobal 해커톤이나 Devcon과 같은 글로벌 이벤트는 코드 그 자체를 넘어, 개발자들 사이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장치로 작동했다.
오늘날 크립토는 점점 더 기술의 무대가 아니라 ‘참여 그 자체’가 제품이 되는 사회적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문화 체인, 즉 기능이 아닌 ‘누구를 위한 체인인가’에 의해 정의되는 블록체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1. 문화가 제품이다
문화 체인은 특정 커뮤니티, 팬덤, 혹은 서브컬처를 위해 기획된 목적 중심의 블록체인이다. 범용 블록체인이 ‘모두를 위한 플랫폼’이라면, 문화 체인은 ‘누군가를 위한 생태계’에 더 가깝다. 무차별적인 확장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즉, 기술적 만능주의가 아닌 정체성과 문화 일관성을 중심에 둔 블록체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블록체인도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컨대, 이더리움은 사이퍼펑크(cypherpunk) 정신과 제도적 중립성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왔고, 솔라나는 고속 처리와 낮은 수수료를 기반으로 혁신성과 밈코인 트레이딩이 공존하는 생동감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들과 문화 체인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더리움이나 솔라나의 문화는 어디까지나 기술 설계의 부산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물이다. 애초에 특정 문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체인은 아니다. 반면, 문화 체인은 처음부터 특정 팬덤과 서브컬처를 중심에 두고 설계된 블록체인이다. 기술이 문화를 만드는 구조가 아니라, 문화가 기술을 이끄는 구조인 셈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블록체인 위에 존재하는 모든 애플리케이션이 오타쿠 커뮤니티를 위한 것이거나, 하드코어 디젠, RPG 게이머, 혹은 특정 NFT 세계관의 팬을 위해 존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 생태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같은 밈에 반응하며, 서로의 유머 코드를 공유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네트워크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도시국가에 가깝다.
범용 체인이 다문화가 뒤섞인 거대한 대도시라면, 문화 체인은 특정 취향과 집단을 위한 테마파크 혹은 르네상스 페어에 더 가깝다. 이들은 기술 스택, 거버넌스 구조, 토크노믹스까지 모든 구조가 특정 소비자층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다.
이러한 커스터마이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 특정 창작자 또는 미디어 워크플로우에 최적화된 인프라 구조
- 온체인 기반의 로열티 및 수익 분배 시스템
- 커뮤니티의 취향과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거버넌스 모델
- 팬의 참여, 후원, 콘텐츠 발견을 유도하는 인센티브 설계
결국, 문화 체인은 일종의 버티컬 블록체인이라고 볼 수 있다. 범용성을 지향하기보다는 명확한 수요층과 문화 기반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내는 전략이다. 여기서의 성장 동력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특정 커뮤니티의 열정과 정체성이다.
2. 코드는 포크할 수 있어도, 문화는 포크할 수 없다
문화가 코드보다 중요한가? 많은 기술 중심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블록체인 인프라는 수학, 암호학, 엔지니어링, 게임이론이 결합된 고도의 기술 집약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록체인 세계에서 코드가 법(code is law)이라는 명제가 통용된다 해도, 문화는 그 세계의 왕이다. 실제로 어떤 프로토콜이 채택되고 사용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커뮤니티다. 아무리 정교한 아키텍처를 갖추었더라도, 그것을 믿고 지지하는 커뮤니티가 없다면 해당 프로젝트는 시작과 동시에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구조적 결함이 존재하더라도, 강력한 밈과 열정적인 지지층이 존재한다면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
크립토 네트워크는 본질적으로 금융 기능이 결합된 소셜 네트워크다. 기술적 설계보다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역학이 채택과 확산을 결정짓는다. FOMO, 정체성, 소속감, 신념과 같은 감정은 깃허브 리포를 포크한다고 해서 복제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트코인과 비트코인캐시(BCH)의 분화다. 양자 간 기술적 차이는 제한적이었지만, 문화적 차이는 극명했다. ‘작은 블록 vs. 큰 블록’이라는 논쟁은 단순한 설계 철학의 차원을 넘어, 커뮤니티 정체성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과는 비트코인의 완승이었다. 이더리움 역시 다오(DAO) 해킹 이후 기존 체인을 유지한 이더리움 클래식(ETC)과 분기되었지만, 동일한 코드 베이스에도 불구하고 각 체인의 철학과 커뮤니티 문화는 완전히 갈라섰다. 기술은 같았으나 문화가 다르며, 이는 곧 프로젝트의 운명을 갈랐다.
2020년 디파이 썸머를 떠올려보자. Yam, Sushi, Pickle 등 농산물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프로젝트들에 수억 달러가 예치되었고, 디스코드와 트위터는 밤새 밈과 YOLO 정신으로 들끓었다. 사용자들은 코드의 완성도보다 커뮤니티의 에너지와 문화적 분위기에 반응해 진입했다. 이는 단순한 투자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참여였다. 이후 일드파밍 열기는 점차 식었지만, 디젠 문화는 크립토 생태계에 영구히 각인되었다.
2021~2022년의 NFT 붐 역시 유사한 맥락이다. 픽셀로 그려진 펑크 이미지나 만화 스타일의 원숭이 그림이 수억 원에 거래되었다. 이 가치는 혁신적인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브컬처의 상징이자, 커뮤니티 입장권이며,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Right click+save’라는 비아냥조차 밈으로 흡수된 것은 이 생태계가 철저히 문화 중심으로 작동했음을 방증한다.
일부 사용자들은 프로젝트의 로고를 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90% 이상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손절하지 않는다. 그것은 코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문화와 공동체, 그리고 그 안에서 공유한 서사(narrative) 때문이다. 결국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코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축적된 문화, 관계, 감정의 총합이다.
문화 체인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대중을 노리는 평이한 기술보다, 열정적인 소수가 만들어내는 진정성 있는 서사에 베팅하는 것이다.
3. ‘시장 크기’가 아니라 팬덤 크기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문화 체인은 과연 실현 가능한 전략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 기술적으로 구축이 가능한 구조인지 2) 제적 확장성과 지속 가능성을 갖추었는지 두 가지 관점에서 그 가능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면, 문화 체인은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기보다는 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기존 인프라를 전면적으로 재구축하지 않고, 범용 블록체인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맞춤형 체인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OP Stack, Arbitrum Orbit, Cosmos SDK, Avalanche Subnet 등은 이미 이러한 커스터마이징 체인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는 유연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DA레이어, RaaS (Rollup-as-a-Service) 솔루션 등 덕분에 이제는 분산 시스템에 대한 깊은 전문 지식 없이도 누구나 자체 블록체인을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즉, 문화 체인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모델이다.
일각에서는 문화 체인이 특정 팬덤이나 소규모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TAM의 한계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니치(niche)에 집중하는 전략은 장기적으로 성장 여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릴 수 있으나, 실제 수치를 들여다보면 이 논리는 다소 설득력을 잃는다. BTS 팬덤의 글로벌 추정 규모는 약 9천만 명에 달한다. 이는 솔라나의 사상 최대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인 3,100만 명을 세 배 가까이 상회하는 수치다. 즉, 단 하나의 팬덤이 이미 대부분의 블록체인을 능가하는 사용자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팬덤은 단지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때로는 브랜드 이상의 힘을 행사한다. 팬덤은 행동하는 경제 단위이며, 고도로 집중된 문화적 에너지다. 이들은 트위터, 텀블러, 디스코드에서 이미 크립토 네이티브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 에너지를 담아낼 그릇이 없었을 뿐이다.
결국 지금 필요한 질문은 더 이상 “얼마나 큰 시장인가?”가 아니다. 이제는 “얼마나 강력한 팬덤인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다. TAM이 아닌 TAC(Total Addressable Culture)을 바라볼 때, 문화 체인은 완전히 새로운 시장 논리를 제시한다.
4. 주요 문화 체인 소개
문화 체인은 PoC 단계를 넘어섰다. 이미 몇몇 프로젝트들은 해당 방향성을 바탕으로 실험을 시작했고, 실제 사용자 기반과 자본 유입, 실질적인 사용 사례를 확보한 채 생태계를 확장해가고 있다.
4.1 스토리 (Story)
만약 다음 세대의 해리포터나 마블 유니버스가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탈중앙화된 커뮤니티에서 탄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스토리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려는 프로젝트다.
스토리는 온체인 기반 창작 IP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누구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그 위에 이야기를 덧붙이며, 원작자들은 이에 대한 보상을 온체인에서 자동으로 정산받을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을 제공한다. 각 창작물의 데이터는 블록체인에 기록되며, 누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해 투명하게 추적되고 자동 보상된다.
이러한 구조는 일종의 오픈소스 서사체계(open-source lore)에 가깝다. 기존의 팬픽션 커뮤니티가 무료로 2차 창작을 해왔다면, 스토리는 여기에 토큰 인센티브와 거버넌스 구조를 결합해 창작 행위를 정당한 경제 활동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기술적으로는 온체인 프로비넌스(provenance) 추적이 핵심이지만, 그 본질은 무한히 확장 가능한 세계관을 모두가 함께 구축하는 팬덤 주도의 IP 네트워크에 있다.
4.2 애니메코인 (Animecoin)
일본 애니메이션 팬덤은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글로벌 커뮤니티다. 수억 명의 팬들이 단일 장르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의 문화적 충성도와 소비력은 이미 수많은 지표를 통해 검증되어 왔다.
애니메코인은 이러한 팬덤의 경제 활동을 온체인화하려는 실험이다. 아즈키(Azuki)라는 NFT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이 블록체인 기반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애니메이션 산업이 Web3를 필요로 하는 이유,’ ‘애니메코인:애니메이션의 신세계를 열다’ 리포트를 참고하길 바란다.
$ANIME는 팬들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펀딩하고, 디지털 굿즈를 거래하거나 창작자를 후원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 토큰의 본질은 단순한 유틸리티를 넘어, 팬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경제적 배지이자, 소속감을 나타내는 사회적 상징에 가깝다. 크립토보다 크런치롤에 더 익숙한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Web3 생태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발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3 앱스트랙트 (Abstract)
앱스트랙트는 기존 팬덤을 블록체인으로 끌어오는 전략 대신, 크립토 네이티브한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하는 방식을 택했다. 펏지 펭귄 (Pudgy Penguins) NFT로 알려진 팀이 주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게임, 수집형 디지털 자산, 소셜 앱 등을 통합한 사용자 경험과 커뮤니티 중심의 생태계를 지향한다. 또한, 앱스트랙트는 복잡한 UX나 높은 가스비가 사용자의 경험을 방해하지 않도록 기술을 가능한 한 추상화한다. 대신, 접근성, 즐거움, 창작의 자유라는 가치를 블록체인 아키텍처에 내재화하여, 사용자가 ‘재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관련하여 구체적인 내용은 ‘앱스트랙트: 크립토의 디즈니랜드를 위한 설계도,’ ‘4조원 NFT 브랜드의 새로운 도전, 앱스트랙트가 바라보는 블록체인의 미래’ 리포트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 세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모두를 위한 체인’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명확한 대상(누군가)을 위한 체인을 설계하며, 그 집단이 머무는 곳에 개발자도, 사용자도, 자본도 함께 모여들게끔 한다. 이러한 구조는 문화 → 사용자 → 앱 → 더 많은 문화로 이어지는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며, 문화 체인이 지향하는 플라이휠(flywheel)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기능한다.
5. 구조적 리스크
문화 체인이 이론적으로 장점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리스크 역시 존재한다. 해당 모델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리스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팬덤은 실제로 투자자가 될 수 있는가?”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위와 자산에 투자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유저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으며, 이 간극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과도하게 낙관적인 가정일 수 있다 즉, 팬덤이 곧 투자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두 번째 리스크는 투기적 수요가 유기적 참여를 압도할 때 발생하는 경제 붕괴다. 이는 이미 수많은 P2E 게임에서 반복된 시나리오다. 초기에는 커뮤니티와 문화가 생태계를 이끄는 듯 보이지만, 일정 시점 이후 경제적 인센티브가 참여의 핵심 동기로 전환되면서, 활동은 ‘놀이’가 아닌 ‘수익 추구’로 변질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훼손하고, 내부 균열을 가속화하게 된다. 문화 체인 역시 이러한 내적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리스크는 생태계의 파편화(fragmentation)다. 문화 체인의 구조상 각 체인은 고유한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독립된 생태계를 구성하게 되며, 이로 인해 크립토 생태계 전반의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과 결합성(composability)이 저해되고 유동성이 파편화될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크립토 생태계 전체의 효율성과 성장성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체인이 의미 있는 규모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호운용성과 연결성을 전제로 한 인프라 설계가 필수적이다. 기술적 독립성과 문화적 집중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도록, 구조적 조율이 병행되어야 한다.
6. 투자자, 빌더, 그리고 사용자별 고려사항
오늘날 크립토 생태계에서 기술적 우위는 빠르게 평준화된다. 어제의 혁신은 오늘의 표준이 되고, 내일은 더 이상 차별점이 되지 않는다. 반면, 커뮤니티가 지닌 고유의 에너지, 즉 소셜 알파(Social Alpha)는 쉽게 복제되지 않으며, 한번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문화야말로 현재 크립토 시장에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진정한 경쟁력이다.
따라서, 이제 VC나 기관 투자자라면 단순히 TPS나 깃허브 커밋 수와 같은 정량적 지표만으로 체인을 평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 이 체인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
- 끝까지 믿고 함께할 열성 지지자들이 존재하는가?
- 밈, 아트워크, 서사(narrative)는 충분히 강력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언뜻 보면 다소 감성적인 평가 기준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생태계의 유기적 성장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선행 지표에 가깝다. 기술이 평범하더라도 강력한 문화를 지닌 프로젝트는,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체인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이러한 투자 판단 논리는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투자와 유사하다. 사용자 충성도, 브랜드 정체성, 네트워크 효과는 결국 네트워크 가치의 핵심 지표이기 때문이다.
빌더 입장에서 문화 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설득과 전파를 반복할 필요 없이 초기부터 명확한 타겟 유저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역으로 실패의 속도도 빠르다는 점을 의미한다. 팬덤의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하면, 생태계는 즉각적으로 외면당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문화 체인을 설계하고자 한다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거버넌스 모델, 커뮤니티 경험, 밈 설계까지 총괄하는 도시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블록체인의 소셜 UX는 UI/UX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문화 체인은 사용자와 크리에이터 모두에게 함께 설계하고, 함께 소유하는 체인을 만들어갈 기회를 제공한다. 이곳에서는 사용자가 곧 콘텐츠이며, 사용자가 곧 가치를 결정한다. 이러한 팬덤 주도의 문화 체인은 제대로 작동할 경우 그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한 자생적 확산력을 만들어내지만, 반대로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나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커뮤니티내 질서를 잃는 순간 누구보다 빠르게 자멸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7. 맺으며
2010년대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크립토의 내러티브는 줄곧 기술 중심이었다. “더 높은 TPS”, “더 빠른 체인”, “더 낮은 수수료” 등 체인은 저마다 자신만의 기술적 우위를 내세웠고, 로드맵은 성능 개선안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기술 경쟁은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체인은 기술적으로 이미 ‘충분히 좋은 상태’에 이르렀고, 차별화는 더 이상 처리 속도나 효율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다음 사이클에서 주목받게 될 블록체인은 기술적 성능만으로는 정의되지 않을 것이다. 정체성과 소속감, 그리고 커뮤니티의 에너지가 체인의 지속성과 성장 가능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 체인은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나?”를 묻기보다, “이 커뮤니티는 무엇을 믿는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세계관, 사용하는 언어, 반복되는 유머 등 문화적 결속 안에서 새로운 체인들이 탄생할 것이며, 그 안에서 다음 세대의 블록체인이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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