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찜, 소스에 따라 와인 상생 달라져
고급 샴페인보다 가성비 화이트 엄지척
와인, 공식보다 음식·온도 더 중요해
[블록미디어 권은중 전문기자] 후배 가운데 경기 안양의 수산시장 근처에 사는 후배 부부가 있다. 나도 수산물에 일가견이 있지만 이 후배는 나보다 더 제철 수산물을 챙긴다. 물론 이 후배 부부 덕분에 나도 가끔 호강을 한다.
얼마 전 이 후배 부부에게 연락이 왔다. 봄의 진객인 새조개를 즐기자고 제안했다. 새조개는 조개의 속살이 새의 부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새조개로 불린다. 쫄깃하고 달다. 주꾸미와 함께 봄을 대표하는 해산물로 꼽힌다. 후배는 요즘 한창 단 시금치와 함께 새조개 샤브샤브를 해먹자고 했다.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사이드 메뉴로 날씨가 따뜻해지면 출하가 안되는 석화를 쪄먹자고 했다. 굴은 날 것으로 먹어도 좋지만 쪄서 먹으면 더 맛있다.
나는 귀한 자리에 들고 가는 샴페인을 준비했다. 새조개가 워낙 고가라서 비슷한 가격으로 준비하는 게 예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샴페인의 하나인 앙드레 클루에 엉 쥬르 드(Andre Clouet, Un Jour de) 1911을 준비했다. 100% 피노누아다. 프랑스 샹파뉴의 그랑 퀴리 밭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만을 선별해 만든다. 특히 밀짚으로 싼 포장이 특이해서 가져가는 자리마다 주목을 끄는 멋진 와인이다.
후배 집에 도착하니 이미 굴찜이 준비되고 있었다. 굴은 봄이 됐는데도 싸알이 꽤 컸다. 정신없이 샴페인과 거의 흡입을 했다. 굴은 날이 따뜻해졌음에도 아주 맛있었다. 그런데 굴과 함께 와인을 마셨는데 앙드레 클루에 엉쥬드 1911보다 뉴질랜드 말보로 쇼비뇽 블랑 파 로드(Pa Roda)가 더 맛이 있는 거였다. 파 로드는 후배 부부가 준비한 와인이었다(후배 부부는 와인보다 위스키를 즐긴다).
파 로드는 상큼한 열대과일과 풀향기가 났는데 이게 찐 굴과 아주 잘 어울렸다. 실례지만 몰래 가격을 찾아보니 1만원대. 내가 가져온 샴페인의 10분의 1 가격이었다. 그런데 비비노에 찾아보니 파 로드의 평점은 4.2. 놀라운 가성비였다. 천하무적의 샴페인이라는 골리앗이 굴밭에서 작은 소년같은 쇼비뇽 블랑에 패배한 것이다.
어떻게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은 앙드레 클루에의 시그니쳐 샴페인의 하나인 엉 쥬르 드1911을 가볍게 누르고 다윗처럼 반짝일 수 있었을까? 승부의 갈림처는 삶은 굴과 함께 먹은 소스였다. 이날 우리는 찐굴을 고추냉이 간장에 먹었다. 이렇게 강하지 않은 소스에 견줘 피노누아 샴페인의 산도와 바디감이 강건했다. 굴에 청어알(예산이 풍족하다면 캐비어)처럼 아주 짭짤한 양념을 올리거나 타바스코 핫소스나 레몬즙으로 산도나 스파이시함을 끌어 올렸다면 오히려 샴페인이 삶은 굴에 훨씬 더 맛있었을 것이다.
다음 코스는 원래 새조개였는데 이날 수산시장에 새조개가 출하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후이상으로 새조개 출하가 매우 불규칙하다고 들었는데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후배가 새조개 대신 선택한 것은 웅피조개였다. 웅피조개는 새조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조개의 속살이 훨씬 붉다. 수산물 애호가인 나도 처음 보는 조개였다. 하지만 나는 웅피조개가 새조개처럼 달지 않고 담백해서 더 좋았다. 전화위복이었던 샘이었다.
후배의 조개 샤브샤브 조리법은 꽤 격조가 있었다. 먼저 백합을 넣어서 육수를 냈다. 보통 멸치나 다시마로 간단하게 국물을 내는데 백합조개 육수라니. 호화로웠다. 백합 육수에 웅피조개를 데쳐 먹었다.
그런데 웅피조개 샤브샤브에는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보다 앙드레 클루에 샴페인이 좀더 어울렸다. 이치는 삶은 굴과 비슷했다. 조개 육수의 감칠맛과 버섯 배추 시금치 채소에서 나오는 복합적인 맛의 레이어에는 산도가 높고 바디감이 좀더 좋은 샴페인이 어울렸던 것이다.
이날 와인 페어링은 애초 내 예상과는 반대였다. 나는 굴에는 샴페인이, 샤브샤브에는 쇼비뇽 블랑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식과 매칭을 해보니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굴에는 샴페인’이라는 공식은 맞지 않았다.
와인은 생각보다 섬세하다. 어떤 음식과 먹느냐, 어떤 온도에 서빙되느냐에 따라서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 때로는 이 섬세함이 복잡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이 와인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다. 이날 나는 ‘와인의 본질도 사람과의 관계와 참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기 전에 어떤 편견을 가지지 말고 만나서는 매 순간순간 경청해야 하는 게 비슷하기 때문이다.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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