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바쁜 시장인 외환(FX) 시장에 구조적인 취약성이 잠복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표면적으로는 하루 7조 5,000억 달러(약 10경 원) 규모의 거래가 발생하는 막대한 유동성을 가진 시장이지만, 주요 금융기관들은 ‘유동성 착시(liquidity mirage)’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시티그룹, 도이치은행, XTX마켓 등 글로벌 외환 시장의 핵심 참여자들은 최근 외환 거래의 깊이가 실제보다 얕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플랫폼의 난립과 알고리즘 트레이딩의 확산이 유동성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지만, 대형 기관의 퇴장으로 오히려 시장의 실질 유동성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 유동성 깊이 얕아져…거래 거부, 스프레드 확대 현상도
표면적으로 외환 시장은 거래 플랫폼의 증가와 기술 발전 덕분에 과거보다 거래가 원활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외환 거래 플랫폼 수는 2012년 20개에서 2024년에는 9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전자거래 비중도 확대됐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오히려 거래를 분산시키고, 은행들이 고객 주문을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유동성이 얇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티그룹의 FX 전자거래 및 알고리즘 집행 책임자인 마크 메러디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유동성이 견고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8월 5일 발생한 ‘엔화 쇼크’가 꼽힌다. 당시 글로벌 투자자들은 엔화를 빌려 다른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를 대거 청산하면서 엔화가 단숨에 3.4% 급등했다. 이로 인해 나스닥지수는 6.4% 급락하고, 일본 닛케이지수는 1987년 이후 최대폭으로 하락했다. 당시 시장에서는 스프레드(매수-매도 호가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고, 주문 장이 사라지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 “유동성 착시가 위기를 키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일시적인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동성이 얕아진 상태에서 시장이 충격을 받으면 평소보다 훨씬 큰 변동성을 초래할 수 있다. 즉, 투자자들이 인식하지 못한 채 과도한 리스크를 떠안게 되고, 위기가 터지면 빠져나올 틈도 없이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은행계 시장조성자인 XTX마켓의 제레미 스마트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은행들은 고객 주문을 상쇄할 수 없어 다시 1차 시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시장에 상대방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EBS, LSEG 등 주요 외환 거래소의 거래량은 수년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다 미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등도 외환 시장을 흔드는 불안요소로 지목된다. 소시에테제네랄의 FX 부문 총괄인 존 에스트라다는 “시장 구조가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유동성이 과거보다 덜 견고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잦은 체결거부와 스프레드 비정상 현상도 빈번
실제 데이터에서도 이러한 유동성 이상징후가 관찰되고 있다. 유로-달러 같은 주요 통화 쌍의 스프레드는 코로나19 이후 꾸준히 비정상적인 패턴을 보이고 있으며, 거래 체결 거부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유로넥스트 FX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스팟(현물) 거래 체결률은 74.5%로 1년 전보다 크게 하락했다. 이는 금리 차이에 따른 거래 증가와 함께 은행 내부 유동성 처리 비율 감소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플랫폼 난립으로 인해 시장 유동성이 플랫폼별로 흩어지고, 일부 플랫폼에서는 평상시보다 비정상적인 호가를 제공하거나, 아예 거래를 포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 BIS “FX는 다른 자산군 대비 견조” 평가에도…한계 존재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외환시장은 주식, 채권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견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BIS는 고빈도 거래로 인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주요 거래소들이 ‘스피드 범프’(속도 제한장치)를 도입한 효과로 설명했다. 하지만 BIS도 분석 대상이 주요 통화에 국한됐으며, 일본 엔화의 경우 팬데믹 이후 오히려 ‘유동성 부족 현상(bout of illiquidity)’이 증가했다고 인정했다.
# “이럴 때일수록 인간관계 중요”… 은행들 ‘직거래 권장’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대형 은행들은 오히려 고객들에게 거래 플랫폼 의존도를 낮추고 전통적인 ‘직접 거래’로 회귀할 것을 권하고 있다. 도이치은행의 FX 전자거래 총괄 베네딕트 카터는 “믿을 수 있는 파트너와 직접 거래하면 기술 비용을 줄이고, 유동성과 가격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며 “위기 상황에서도 확실한 거래 상대방이 되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헤지펀드와 자산운용사들도 실제로 플랫폼보다는 대형 은행과의 직접 거래에서 더 나은 가격을 제공받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근에는 미국 관세 관련 뉴스가 이어지면서 음성 통화(voice trading)를 활용하는 사례도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각국 금융당국도 외환시장의 구조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지난해 처음으로 외환시장 구조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시장 구조 변화가 가격 급등락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영국 중앙은행 역시 장외(OTC) 시장의 투명성 강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FX시장의 구조적 불안정성이 과연 글로벌 금융시장의 새로운 뇌관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같이 보면 좋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