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명정선 기자] 영국을 대표하는 명문 자산운용사 슈로더스(Schroders)가 창립 200여 년 만에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2018년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초청하며 새 사옥을 성대하게 열었던 슈로더가 7년 만에 생존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고금리와 고물가로 촉발된 투자 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슈로더스의 주력 사업이던 주식형 액티브 펀드는 글로벌 투자자금의 흐름이 ETF(상장지수펀드)와 사모펀드(Private Equity)로 이동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낮은 수수료, 높은 대체투자 수요를 앞세운 패시브·사모 시장이 커지면서 슈로더스는 설 자리를 잃었다.
# ETF·사모에 밀려… 명성만 남은 ‘노쇠한 공룡’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런던 중심부 바비칸에 28층짜리 본사를 새로 짓고 여왕까지 불러 세웠던 슈로더스는 이제 ‘낡은 공룡’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영국 내 주요 연기금, 공공기관, 상류층 고객의 자산을 맡아 굴려왔지만 패시브·사모에 밀려 투자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고 있다는 평가다.
주가는 2021년 고점 대비 무려 45%나 폭락했고, 창업가문인 슈로더 일가의 자산도 절반 이상 증발했다. 고(故) 브루노 슈로더의 딸 레오니 슈로더가 이사회에 합류했지만,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팬뮤어 리버럼의 레이 마일 애널리스트는 “슈로더 가문은 주가가 오르기만 바라고 있지만 지난 7년간은 내리막길이었다”고 했다.
# M&A와 전략 다변화도 효과 못 봐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전임 피터 해리슨 CEO는 사모 대체투자와 부동산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벤치마크 캐피털, 애드벡, 블루 오차드, 그린코트 캐피털 등 대체투자 운용사들을 잇따라 인수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블랙록(ETF), 블랙스톤, KKR 등 미국계 대형사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기존의 강점이던 주식형 공모펀드가 더욱 위축됐다.
마일 애널리스트는 “해리슨은 주주들의 돈으로 여러 회사를 사들였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으로 고객들은 ETF 시장에서는 블랙록으로, 사모 시장에서는 블랙스톤, 칼라일 등으로 자금을 이동시키며 슈로더스를 외면했다. 텔레그래프는 “슈로더스는 액티브와 사모를 모두 노렸지만, 오히려 중간에서 끼인 구조가 됐다”고 분석했다.
# 슈로더스가 크립토 업계에 던지는 신호
슈로더스 사례는 단순히 전통 금융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크립토 업계도 비슷한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글로벌 자금은 비트코인 현물 ETF나 사모형 디지털 자산 펀드처럼 ‘저비용’ 혹은 ‘대형화 된 투자상품’으로 몰리고 있다. 이는 전통 금융에서 ETF·사모펀드가 슈로더스 같은 액티브 펀드를 위협했던 흐름과 닮아 있다.
초창기에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DeFi 토큰 등을 직접 분석하고 운용하는 액티브 전략이 주류였지만, 기관자금이 ETF, 사모형 구조화 상품으로 쏠리면서 디지털 자산 운용사들도 전략 수정에 나서고 있다. 크립토 업계 관계자는“이제는 크립토도 전통 금융처럼 저비용 상품이나 사모형 대체투자 구조로 자금이 옮겨가고 있다”며“슈로더스 사례처럼 전략 전환을 놓친다면 비슷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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