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93년 8월 12일 저녁 7시 30분. `대통령 긴급 발표`라는 자막과 함께 TV에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 스스로 “개혁중의 개혁”이라고 표현했던 금융실명제의 전격 실시를 천명한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처음 검토된 후 10여년를 끌어왔지만 결국 실행되지 못한 미완의 개혁이었다. 그만큼 반발과 논란이 많은 뜨거운 감자였다. 김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는 구 정권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극비 보안 속에 치밀하게 준비됐다.
◆ “철통 보안을 유지하라”
금융실명제 실시의 최대 관건은 `보안 유지`였다. 실명제 단행 사실이 미리 새나갈 경우 자금이탈이 가속화되고, 금융시장은 공황상태에 빠질게 뻔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두 달이 되어가던 4월 18일, 이경식 부총리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지시한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부총리에게 3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가급적 빨리 마무리할 것
둘째, 완벽하게 추진할 것
셌째, 절대 보안을 지킬 것
이 세가지 주문사항 중 대통령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보안 유지’였다. 김 대통령은 실명제 준비팀에게 절대보안을 지시하는 한편 경제부처 관료들에게 실명제에 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정부내에서 실명제 실시시기나 방법 심지어는 실시 여부를 놓고 말이 나도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대통령의 함구령 속에 보안은 철통같이 지켜졌다.
8월 12일 발표 당일. 청와대내에서 실명제 발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은 김 대통령과 박관용 비서실장, 박재윤 경제수석 등 3명 뿐이었다. 다른 비서관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발표 다음날 수석비서관들과 조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수석들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경제 혼란을 우려해 보안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3부 요인을 포함해 정부 고위각료들이 실명제 실시 사실을 통보받은 것도 발표 당일 오후였다. 박 실장은 오후 4시 황인성 국무총리를 방문해 내용을 직접 통보했고, 이만섭 국회의장,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이기택 민주당 대표 등에게는 전화로 발표사실을 전했다.
이경재 청와대 대변인도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지 전혀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대통령은 이날 오전 대변인에게 “오후 7시까지 기자들이 퇴근하지 않도록 하라”는 언질만 주었을 뿐 무슨 연유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후 5시 30분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김 대통령은 최창윤 총무처장관에게 긴급 국무회의 소집을 통보하라고 지시한다. 같은 시각 재무부는 은행 증권 보험 등 각 금융기관 책임자들을 제일은행 본점 4층으로 소집, 곧 발표될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한 만반의 시장준비를 마쳤다. 8.12 금융실명제 발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보안유지 속에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 역대 두 번째 `대통령 긴급명령`
금융실명제 실시는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으로 발표됐다. 대통령 긴급명령은 72년 8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채동결조치 때 발표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이후 두번째였다.
김 대통령은 이날 발표한 담화문에서 긴급명령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회에서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법률을 개정하자면 예상되는 부작용이 너무도 큽니다. 과거 금융실명제 실시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금융시장이 동요하고 경제의 안정이 위협받아 왔습니다. 고심 끝에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국회에서의 법개정 절차를 대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격적인 실명제 발표 이후 금융시장은 일대 회오리에 빠졌다.
발표와 동시에 이날 오후 8시를 기점으로 은행 증권 보험 단자 농협 우체국 새마을금고 등 모든 금융기관의 예적금과 주식, 자기앞수표, 양도성예금증서(CD) 거래와 이자의 지급 및 상환 등 모든 금융거래가 실명으로만 처리 가능했다. 가명이나 차명으로 돼 있는 기존 예금은 실명제 발표 이후 첫 거래시 금융기관 창구에서 반드시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동안 비실명으로 거래해 온 금융자산 소유자들은 2개월 이내에 명의를 실명 전환해야 했다. 이 기간을 넘겨 전환할 경우 매년 10%씩 최고 60%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실명전환 의무기간 이후 발생하는 비실명 이자배당소득에 대해서는 96.75%라는 초고세율로 중과세하는 등 강력한 제재가 뒤따랐다. 실명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금융거래를 할 수 없도록 만든 구조였다.
◆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촉발
실명제 실시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비실명 금융거래를 법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경제개발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60년대 초반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부분을 국내에서 충당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저축을 늘려야만 했다. 저축 유도를 위해서는 재산축적 과정이나 재산규모가 공개되지 않도록 보장해 줄 필요가 있다는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61년 7월 “예금 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 비실명거래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돈의 출처를 묻지 않을 테니 무조건 저축하라는 정치적 흥정이었다.
이 같은 비실명거래 허용은 결국 지하경제의 온상인 사채시장 확대로 이어졌고, 이를 통한 음성 거래와 핫머니 유출입은 이후 30여년간 국내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금융실명제 실시 여부가 정부내에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82년 5월이었다. 당시 만성적인 자금부족과 공금리 통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사금융이 활개를 쳤고, ‘장영자-이철희 사건’으로 불리는 희대의 금융사기사건이 발생한 직후였다.
사채시장의 큰 손으로 불렸던 장영자는 최고 권력층과의 인맥을 과시하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규모인 7000억원대의 어음 사기극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사채시장 자금이 동원됐다.
사건의 파장이 확대되자 정부 고위층내에서 금융실명제 실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마침내 재무부가 공식적인 정책 검토에 착수하게 된다. 희대의 금융사기사건이었던 장영자 사건이 실명제 논의를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 두 차례 유보된 미완의 개혁
실명제 실시를 위한 재무부의 검토 결과는 82년 7월 첫 모습을 드러냈다. 강경식 당시 재무부장관이 “빠른 시일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며 정부의 실명제 실시 의지를 공식 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2개월간의 내부검토 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간단한 사안이 아니었다. 비실명 거래의 혜택을 누려왔던 거액 자산가들과 기득권층이 거세게 반발했고, 정부의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지하자금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금융실명제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현실적으로 실행수단이 마땅치 않은 ‘뜨거운 감자’였다.
82년 9월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열린 고위 당정협의에서 반대론이 득세하면서 금융실명제는 결국 `유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날 당정협의에서는 허화평 정무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이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밝혔고, 당시 정권 실세였던 노태우 내무장관과 5공 자금줄이었던 이원조 석유개발공사 사장 등도 반대의견에 동조했다.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과 강경식 재무장관 등 일부 관료들이 실명제 조기 실시를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83년 1월, 결국 전두환 정권은 준비미흡과 경제적 파급 등을 이유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86년 1월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실명제 실시 의지를 천명한 지 반 년도 안돼 스스로 거둬들인 꼴이다.
이후 실명제 논의가 다시 화두로 부상한 것은 4년이 지난 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 였다. 각 당의 대권 후보들이 일제히 금융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선거 결과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후보는 취임 이후 곧바로 실명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액션플랜에 착수했다. 89년 4월 재무부내에 “금융실명제거래 실시준비단”을 발족, 실명제 시행을 위한 구체적인 행보에 나섰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실명제 검토 작업도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좌초하고 만다. 금융시장 붕괴와 투기 만연, 자금이탈 우려 등 반대 목소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90년 3월 이승윤 부총리를 통해 실명제 실시 ‘유보’를 발표하게 된다. 실명제 논의가 83년에 이어 두번째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실명제 논의는 이후 유야무야 됐다가 김영삼 정권이 집권하면서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후보 시절 실명제 조기 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 직후 이경식 부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금융실명제 실시를 준비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한다. 김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실명제 실시를 검토하다가 두 번이나 좌초했던 과거 정권의 실패 사례를 거울삼아 철저한 보안 속에 작업을 진행하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철통 같은 보안유지에 힘입어 김 대통령은 4개월 후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11년에 걸친 길고 긴 산고 끝에 마침내 실명제가 새로운 금융제도로서 이 땅에 닻을 내리게 된 것이다.
◆ KDI팀과 재무부팀의 극비 작업
금융실명제 검토에 대한 첫 지시가 내려진 것은 93년 4월 18일, 김 대통령이 이경식 부총리와 독대한 자리에서였다.
이로부터 한 달 후 김 대통령은 부총리 라인과는 별도로 홍재형 재무부장관에게도 실명제 실시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실명제 실시를 위해 부총리 라인과 재무부 라인, 두 축을 가동한 것이다.
대통령 지시를 받은 이경식 부총리는 곧바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양수길 박사를 불러 작업개시를 알렸다. 양 박사는 KDI에서 실명제 방안을 연구해 온 남상우 박사와 김준일 박사를 작업에 참여시켜 연구팀의 골격을 갖췄다.
당시 KDI내에서는 이미 실명제 실시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해오던 참이었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이 실명제 조기실시를 공약으로 내세움에 따라 누가 대통령이 되든 조만간 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연구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KDI는 금융실명제를 3단계로 실시하는 방안에 대해 내부 검토를 마무리지은 상태였다. 첫 단계로 금융실명거래를 의무화하고, 2단계로 금융자산 종합과세를 실시하며, 마지막으로 주식투자차익에 대한 과세를 실시한다는게 골자였다. KDI팀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안 마련에 착수했다.
이와 별개로 홍재형 재무장관이 주도한 재무부팀은 김용진 세제실장-김진표 세제1심의관-임지순 소득세과장으로 이어지는 세제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여기에 89년 실명제 실시준비단에 참여했던 진동수 과장이 합류했다.
이들 재무부팀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두 세제와 실명제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실명제가 거론될 때마다 정부내에서 구체적인 실무안을 짜는 업무를 해왔기 때문에 실명제 실시 못지 않게 그 후유증에 대한 대비책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KDI팀이 이론적 측면에서 실명제 실시 방안을 모색했다면, 재무부팀은 실명제에 따르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살피고 대책을 제시하는데 더 중점을 두었다.
실제로 7월 중순 KDI팀과 재무부팀의 합동조율 작업이 시작되면서 KDI팀이 만든 실명제 초안은 상당부분 수정된다. 당시 KDI가 마련한 초안에는 ▲실명전환 기간 중 전환하지 않은 가명계좌 예금은 전액 몰수하고 ▲무기명 채권이나 무기명CD도 실명전환 기간 중 등록하지 않으면 몰수조치하고 ▲증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식시장을 5일간 폐장하는 등 비교적 강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KDI안을 받아 본 재무부팀은 내용을 상당부분 완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실제 정책으로 집행할 경우 파장이 너무 클 것이라는게 재무부팀의 우려였다.
결국 KDI팀이 다분히 이론적인 입장에서 작성한 초안을 재무부팀의 의견에 따라 현실에 맞춰 완화시켜 나가는 작업이 진행됐다. ▲증시 충격 ▲중소기업 자금난 ▲실무투기 우려 ▲외화도피 가능성 등 실명제 실시에 따라 예상되는 모든 가능성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 해외출장 명령 받고 아파트에서 합숙
실명제 준비팀은 두 곳의 아지트를 거점으로 비밀작업을 진행했다. 한 곳은 대치동 휘문고교 앞에 있는 모 빌딩 사무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천 시내에 있는 주공아파트였다.
대치동 사무실은 양수길 박사가 친구로부터 개인용도를 내세워 임시로 빌린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입구에는 보안을 위해 “국제투자연구원”이라는 엉뚱한 간판을 내걸었다. 이 곳에서는 KDI팀이 주로 작업했으며, 이경식 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 양 박사 등이 밤늦게 까지 실명제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막바지 작업이 피치를 올리면서 과천 정부청사 부근에도 작업실이 필요해졌다. 야간작업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합숙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 평촌과 과천 일대를 뒤진 끝에 두 달간 사용하는 조건으로 과천 주공아파트(48평) 한 채를 370만원에 세내 입주했다.
과천 작업실이 확보되면서 재무부의 임동빈 관세정책과 사무관과 최규연 외자정책과 사무관이 작업팀에 새로 합류했다. 이들은 89년 실명제 실시준비단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막바지 합숙 요원으로 차출됐다.
김용진 세제실장은 합숙에 참여할 이들을 합법적으로 빼돌리기 위해 해외출장 명령이라는 꾀를 냈다. 출장 명령은 “선진국 금융종합과세에 대한 자료수집” 명분으로 내려졌다. 가짜 해외출장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임 사무관과 최 사무관은 출발 당일까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은 실제로 해외출장을 가는 줄 알고 7월 28일 공항에 나갔다가 현지에서 상황설명을 듣고는 몸을 숨겨 과천 안가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장기 해외출장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들은 과천 안가에서 국제전화를 사칭해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를 해야만 했다.
김진표 심의관과 진동수 과장은 낮에는 과천 청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안가의 합숙작업에 참여하는 이중생활을 감수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이들은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에서 내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드나들었다.
주거지역인 아파트 단지에 중년 남자들이 밤낮으로 들락거리는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비쳐질게 뻔했다. 작업팀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대학교수들인데 방학을 맞아 공동으로 논문을 쓰고 있다”며 “수시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연막을 쳤다.
실명제 발표가 있은 후 이 아파트 경비원 강 모씨는 “논문 작성을 위해 매일 밤 불을 밝히고 일을 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며 “엄청난 양의 폐지가 쏟아져 나와 의아스러웠지만 이들이 금융실명제를 탄생시킨 실무진이었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술회했다.(경향신문 93년 8월 14일)
◆ “D데이는 8월 12일“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 발표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가를 놓고 작업팀내 논의가 전개됐다. 발표 형태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하기로 내부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작업팀은 국회가 열리지 않는 8월중 주말을 놓고 택일에 들어갔다. 토요일을 고르다 보니 8월 14일과 21일, 28일이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8월초에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는데 발표를 8월 중순 이후로 미룰 경우 보안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컸다. 이 같은 이유로 21일과 28일은 후보에서 제외됐다. 남은 날짜는 14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이 광복절이어서 분위기상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런 저런 고민을 진행하는 와중에 대통령으로부터 평일도 상관없다는 언질이 내려왔다. 작업팀은 주저없이 목요일인 12일을 발표 D데이로 낙점했다. 12일 발표할 경우 다음날인 13일 금융기관 개점시간을 늦춰 1차 교육을 실시한 뒤 그 날 오후와 토요일인 14일 오전에 약간의 실전을 경험하면 다시 일요일로 이어지는만큼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 대통령이 실명제 발표 시점을 12일로 최종 확정한 것은 발표 사흘 전인 9일 부총리와의 면담자리에서였다. 이 부총리는 이날 작업팀이 마무리한 금융실명제 최종 방안을 보고하면서 발표 시점을 12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D데이 확정 사실이 작업팀에 전달된 것은 발표 하루 전인 11일 오전이었다. 보안을 위해 작업팀에도 바로 하루 전에야 통지가 내려온 것이다. 작업팀은 과천시내 인쇄소인 `범신사`를 전세내 11일 오후 2시부터 발표문과 보도자료 등 관련 문서 인쇄에 들어갔다. 근 두달여 동안 진행해 온 실명제 준비팀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다음날인 12일 오전 이 부총리는 “대통령에게 내년 예산에 대해 보고할 것이 있다”고 연막을 치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실명제 실시에 관한 마지막 보고와 함께 대통령 담화문 원고를 전달했다.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3부 요인에 대한 사전 통지에 이어 오후 7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됐고, 7시 30분에는 대통령 담화문이 발표됐다. 또 오후 8시에는 부총리와 재무부장관의 특별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등 실명제 발표를 둘러싼 제반 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성공한 개혁
김 대통령은 후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개혁중의 개혁”이라고 자찬했다. 사회적 논란 속에 두번이나 유보됐던 실명제를 도입하는 일은 그만큼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정작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세간의 우려는 눈 녹듯 사라졌다. 약간의 마찰이 있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실명 의무전환 마감일인 93년 10월 12일, 재무부 최종집계 결과 가·차명계좌 가운데 실명전환한 금액은 5조6726억원에 달했다. 전체 대상계좌의 96%가 실명으로 전환했다.
경제 부작용에 대한 우려 역시 기우였다. 실시 직후인 93년 3분기와 4분기 GNP성장률은 6.8%와 6.4%를 넘어서 실명제 실시 전인 2분기의 4.8%를 크게 웃돌았다. 실명제 실시 이후 오히려 경제 회복세가 더 뚜렷해졌음을 보여준다.
증권시장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실명제 발표 당시 725포인트였던 주가는 그해 말 866포인트까지 올랐고, 94년 2월에는 970포인트까지 상승하는 등 한동안 초강세를 이어갔다.
금융실명제의 성공적 정착에 힘입어 정부는 95년 1월 부동산실명제를 도입, 부동산 거래시에도 실명만을 사용토록 의무화했으며, 96년부터는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시행했다. KDI가 제시했던 3단계 금융실명제 방안 중 2단계까지가 법제화돼 실제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명제의 효과는 이후 자금흐름 개선으로 명확히 드러났다. “돈에 꼬리표가 없다”는 말은 옛 말이 되어 버렸다. 기업 비자금이나 정치자금 등 검은 돈의 세탁과정이 드러나면서 철퇴를 맞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다 금융실명제 덕분이다.
도입 과정에서 곡절이 있긴 했지만 금융실명제는 이제 너무도 당연한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금융계좌를 신설하려면 실명으로 해야 한다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11년에 걸친 난산 끝에 도입한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의 불투명한 금융관행을 바꿔 놓으며 지하경제의 폐해를 뿌리뽑는 확실한 기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