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미디어 이건우 객원기자] 1997년 12월 3일. 우리 역사에 기록된 경제 국치일(國恥日)이다.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밤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이행각서에 서명했다. 이른바 “IMF체제”의 시작이었다.
IMF체제는 국민생활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은행, 대기업 등이 줄줄이 문을 닫거나 통폐합됐고, 100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계는 가계대로 얇아진 월급봉투에 맞추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불과 1년 전 선진국 사교클럽인 OECD에 가입해 어깨를 으쓱대던 자부심은 간데 없이 사라졌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온 국민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가혹한 시련이 한국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Get out of Korea. Right now..”
97년 외환위기 일지는 한보철강 부도에서 부터 출발한다.
신년 벽두, 한보철강이 5조원대의 부도를 낸 것을 시작으로 삼미 진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누적된 경영부실에 경기불황까지 겹치면서 잘 나가던 대기업들이 잇따라 자금난에 내몰렸다.
7월 15일 당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가 마침내 부도방지협약 대상기업으로 선정됐다. 사실상의 부도였다. 투자자들은 위기를 감지했고, 발빠른 선수들은 자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한보가 위기의 서막이었다면 기아는 클라이맥스였다.
대외 여건도 악재투성이였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한데 이어 8월 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붕락했고, 이어서 10월 23일에는 홍콩증시가 대폭락했다. 특히 홍콩증시 폭락은 외환위기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한국시장에 치명타였다. 동남아 투자를 늘려왔던 종금사들과 이들을 상대로 금리장사를 해왔던 국내은행들은 10.23 홍콩사태를 계기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외국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동남아국가 채권을 매입하고 이를 다시 담보로 넣는 소위 레버리지 레포(REPO)거래를 해온 종금사들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동남아 사태로 인해 담보가치가 떨어져 부족분만큼 돈을 더 넣어야만 했지만 어디서도 자금을 구할 수 없었다. 은행들도 이미 라인이 끊어진 상황이었다.
홍콩 사태의 파장은 즉각 반영됐다. 다음날인 24일 종합주가지수는 33.15포인트 폭락했다. 스탠더드앤푸어즈(S&P)는 이날 AA+(우수)였던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양호)로 한 단계 떨어뜨리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외환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런 와중에 모건스탠리증권이 10월 27일 전 세계 투자가를 대상으로 한 장의 긴급 전문을 날린다.
“아시아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 즉시 팔아치우고 빠져 나오라.”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다음날인 28일 종합주가지수가 또다시 35포인트 폭락하면서 저항선으로 여겨졌던 500선이 붕괴됐다. 환율은 가격제한폭 까지 뛰어 올랐다. 당시 외국인투자자들의 한국 탈출은 엑소더스를 방불케 한다. 10월 한 달에만 1조원 이상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국을 탈출하라”는 외국계 기관들의 경고 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기 시작했다. 11월 5일 미국계 블룸버그통신이 “한국의 가용외환보유고는 20억달러에 불과하다”며 위기감을 조장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세계 주요 언론들이 블룸버그를 인용해 한국의 경제위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같은 날 저녁 홍콩페레그린증권이 한국경제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타를 날린다. 이날 홍콩페레그린증권이 전 세계에 뿌린 보고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Get out of Korea. Right now.”
이유 불문하고 지금 당장 한국에서 빠져 나오라는 급전이었다.
◆ IMF로 가라
외국계를 중심으로 경고 사이렌이 잇따라 울려대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IMF행을 포함한 대응책을 논의한 것은 블룸버그와 홍콩페레그린증권의 경고 사이렌이 울린 직후인 11월 7일이었다.
이 날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로 부터 “최악의 경우 IMF에 갈 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윤진식 청와대 비서관이 대통령과 면담해 “돈줄이 꽉 막혔습니다”며 직보를 올린 것도 이 때 쯤이다.
상황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다음날 이경식 한은 총재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이 총재. 갱제(경제)가 이래 가지고 되겠나?”
“각하 큰일입니다. 나라가 부도나기 직전입니다.”
“그러면 우에 하노?”
“미국은 돈 안줍니다. IMF에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설마 IMF에 가기까지야 하겠나..”라며 안이하게 생각했던 대통령은 이 날 이 총재와의 통화 이후 “IMF로 가야 한다”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까지” 동아일보)
대통령의 결심은 11월 14일 강 부총리의 청와대 보고자리에서 표면화됐다. 김 대통령이 먼저 “나라가 결딴 날 판국이다. IMF로 가라”며 확답을 내려준 것이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정부는 캉드쉬 총재와의 비밀 협의를 거쳐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 “은행 2곳, 종금사 12곳 폐쇄시켜라”
97년 11월 16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 스위트룸.
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온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와 마주 앉았다. 강 부총리가 외환보유고 현황을 브리핑하고, IMF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했다. 환율변동제한폭 확대를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이 곧 발표될 것이라는 내용도 언급됐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캉드쉬 총재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지원하면 되겠습니까?”
“최소한 300억달러는 돼야 합니다.”
“한국의 경제규모라면 그 정도 돈은 있어야겠지요.”
300억달러 규모 IMF 구제금융 방안은 이렇게 가닥을 잡았다.
이 날 회의에서 양측은 자금지원 규모 외에 몇 가지 추가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합의를 보게 된다. 잠정 합의된 사항은 ▲11월 19일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신청하고 ▲IMF는 구제금융 신청 다음날인 20일 실사단 1진을 한국에 파견하며 ▲300억달러 중 1차분은 연내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캉드쉬 총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요?”
“대통령 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당시는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3인이 경합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선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경식 총재가 답하자 캉드쉬는 “그러면 후보들의 동의서라도 받아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 차기 정권을 잡을 지도자로 부터 IMF 요구사항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확약을 분명히 받아 두겠다는게 캉드쉬의 계산이었다. 강 부총리나 이 총재나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캉드쉬 총재가 돌아간 후 구체적인 지원조건을 놓고 한국 정부와 IMF간의 실무협상이 진행됐다. 협상이 막바지에 달할 즈음 IMF측이 새로운 부속합의서를 들고 나왔다. “서울, 제일은행 등 2개 시중은행과 12개 종합금융사를 즉각 폐쇄하라”는 것이었다.
거시 산업 노동 금융 대외거래 등 상당 부분에서 합의를 이루고 양해각서까지 교환하고 난 상태에서 IMF측이 추가로 내놓은 부속합의서였다. 당시 폐쇄대상 종금사로 청솔종금 한 곳만을 염두에 두고 있던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였다.
한국 대표단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IMF는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비밀리에 방한한 립튼 미 재무차관이 IMF 협상단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하면서 IMF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당장 사정이 급한 한국 대표단은 저자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9개 종금사를 영업정지 시키고, 2개 은행 처리는 6개월의 여유를 두고 추진한다’는 선에서 막판 합의를 보게 된다.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쳐 12월 3일 마침내 “IMF 대기성차관에 관한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이로부터 이틀 후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가 국내에 입금된다.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IMF 경제신탁통치’가 시작된 것이다.